나는 사업을 함에 있어서 "처음엔 지더라도 나중에 이기면 된다"는
마음가짐을 갖는다. 투자도 없이 이익만을 바란다는 것은 사업이라기
보다 도박이나 투기에 가까운 것이다. 항상 이기기만 바라는 것 또한
겸손하지 못한 방만과 통하는 것이 아닐수 없다.

당시 미군과는 경비 용역 계약이라는 것은 있어도 수송용역 계약이란
아직 선례가 없었다. 미군과 포괄적인 수송계약이 목표였던 나는 그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 직원들로 하여금 부두에 나가 미군 물자를 밤새 지키게
하고 경비와 함께 하역작업을 돕겠다고 제안했다.

이익은 커녕 오히려 손해를 자청하는 투자였던 것이다. 미군측은 그런
제의조차도 처음엔 의심했다. 끈질기게 설득해서야 고작 "일체의 절도
사건을 책임진다"는 조건으로 내가 제시한 자청경비가 허용되었다.
반대급부로 내건 한진상사와의 수송계약은 "고려해보겠다"는 대답밖에
얻을수 없었다.

"지면서 이기는것, 되로 주고 말로 받는것이 사업이다"이 믿음으로
나는 용기를 북돋았다.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신뢰의 눈길을
보냈고 교류도 깊어져 갔다. 매사를 자본주의적 합리성에 입각해 처리하는
그들의 심리등을 곰곰 생각해보니 내가 믿을 만한 계약 당사자임을 알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미군들을 대할때 우리나라 특유의 인간적인 면모와 함께 동등한
계약 당사자로서의 당당함을 지켜나가려고 애썼다.
미국인과의 계약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계약이었기 때문에 업자
측의 입장도 존중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당하게 부를 형성한 사람을
시기하지 않고 오히려 존경했다. 때문에 불필요하게 저자세로 사정하거나
굽실거리기 보다는 내가 어엿한 기업가라는 점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런 생각에서 나는 미국인들과 만날 때는 지프를 이용하지 않았다.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중고 지프를 애용했지만 대개 출처가 불분명해
오해받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당시 구경하기조차 힘들던 벤츠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기업인으로서의 확실한 신뢰감을 심어주는 한편 미군들과의
교류를 넓혀 갔다.

특히 한번 알게 된 사람이 임기를 마치고 귀국할 때에는 집으로 초대
하기까지 했다. 그 집이 부암동에 있는 자택인데 현재까지 살고있다.
그때는 남이 건축하고 있던 미완성 석조건물을 사서 요리사등을 고용하여
여름별장처럼 손님접대에만 이용했다. 나는 접대 석상에서 절대로 업무에
관한 이야기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때로는 미국에서도 쉽지 않은 풀
코스의 식사도 대접하여 인간적으로 신뢰할수 있는 관계를 맺고자 했다.

당시 미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인상이랄까,편견이 심해서 "길"하면
"먼지투성이"요, "집"하면 "판자집"을 떠올리던 시절이었다. 의정부에
주둔하는 미군들이 서울에 올때는 마스크까지 쓰고 다녔다. 그런
그네들에게 이러한 파티는 한국에 대한 시각을 고쳐주는 기회도 됐다.

후일담이지만 이 무렵에 사귀었던 많은 미국인 친구들이 귀국해 나중에
국방부등에서 근무하면서 전혀 예기치 않게 한진의 월남 용역사업참여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어느정도 미국사람들의 신용을 얻고 있다는 확신이
서면서 미군수품의 책임제 수송을 제의했다. 즉 수송도중에 발생하는
일체의 사고에 대해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한진상사가 변상하겠다는 조건부
수송계약을 내건 것이다.

끈질긴 줄다리기 끝에야 비로소 미8군의 구매계약 담당관이 차고와
정비시설등 현시조사를 실시하고 그해 가을이 다 지나갈즈음 마침내 첫
계약이 이루어졌다.
당시 수송업체로서는 유일하게 자체 정비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던 사실도
미군의 신뢰를 얻는데 커다란 도움이 됐다.

1956년11월1일 미8군 군수참모부장실에서 계약금액 7만달러, 6개월
잠정계약으로 수송 도중의 사고로 인한 손해는 한진상사가 일체 배상
하고 수송에 따르는 유류는 미군이 별도로 현물지급하는 것을 골자로한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기름 구하기가 어렵던 시절이어서 이런 조건은
남보다 원가를 줄이는데 도움이 컸다.
계약서에 서명하면서 나는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한진상사 창립11주년 기념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