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부터 시작된 도상훈련(CPX)과 더불어 북한이 남침을 한다면 직원
각자가 자기직장을 사수해야 서울방위가 가능하다는 논리로 사격훈련이
시작되었다.

나는 한은사격대회에 나가 간부급에서 일등을 했고 금융단사격대회에서도
부서장급이상 간부급조에서 우승하는등 금메달을 5개나 갖고있다. 내가
사격을 잘한다는 것은 남도 나도 놀란 일이다.

유신헌법의 실시로 이를 반대하는 재야세력의 항거,김대중씨 동경납치
사건,중동전에 따른 석유파동의 격화,그리고 74년8월15일 육영수여사 시해
사건등 국내외 여러사건들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해는 가고 달이가서 76년
가을이 되자 나는 평생직장인 한국은행을 떠나 환은밖에서의 인생을 시작
하게 되었다.

그해 10월말께 김성환총재는 나에게 중소기업은행전무로 결정되었으니
한국은행밖에서 일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은행을 떠나는 것이 몹시 서운했으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보는
것도 인생에서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남상진 중소기업은행장은 재무부차관에서 은행장으로 선임된지 얼마
안되었는데 내가 전무로 부임한것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77년초 남행장과 나는 함께 한차에 타고 전국을 누비면서 지점을 순시
했다.

종전에는 행장이 외출하면 전무는 행장대신 은행을 지키는것이 관례였는데
남행장은 지방뿐만 아니라 시내지점 순시때도 나를 데리고 함께 순시를
다니며 "중소기업은행은 전국은행이지만 예금액이 상업은행의 절반밖에
안되는 3류은행이니 둘이 힘을 합해서 일류은행으로 만들자"고 했다.

예금액을 은행별로 비교해보면 당시 성장세가 가장 빠른 은행은 국민은행
이었다. 국민은행의 예금고가 급성장하는 이유를 분석한 결과 국민은행
지점은 주택밀집지역의 주민들이 장보러오는 시장옆에 위치해서 가정집
예금과 소상인 예금을 많이 끌어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로 이것이다. 과거엔 예금이 기업자금 중심이었는데 경제발전으로
임금이 인상되면서 개인소득이 증가,가정예금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소기업은행은 중소기업지원이라는 특수성때문에 여신위주로
중소기업이 많은곳에 지점을 두고 아파트등에는 침투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택가에도 지점이 별로 침투하지 못했고 지점중에는 임대료를 절약하느라
뒷길에 있거나 2층에 있는등 가정주부나 바쁜 상인들이 찾아가기 거북
스러운 곳에 위치해 예금을 흡수하기 어려웠다.

남행장과 의논해서 가정주부의 예금을 흡수할수 있는 위치에 지점을 대거
증설하고 골목길과 2층에 있는 지점은 대로변으로 이전하는 작업을 시작
했다. 남행장이 재무부출신이라 지점증설등에는 재무부가 각별한 협조를
해주었다. 물론 재무부로서는 중소기업지원자금조성을 위한 예금활동을
지원한다는 대의명분도 있었다.

이같은 점포행정의 성과로 77년 국민은행의 60%수준에 그쳤던 예금액이
79년에는 65%수준까지 향상됐고 상업은행과의 격차도 줄어들었다.

다음 과제는 쥐꼬리만한 외화대출재원을 확대시켜 폭주하는 기계수입자금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남행장은 재무부의 지원을 받고 나는 ADB
IBRD와의 과거친분을 이용해 마닐라와 워싱턴을 방문,ADB로부터는 연간
3천만달러,세계은행으로부터 연간 5천만달러의 전대자금을 빌려 중소기업에
기계수입외화대출을 해준것이 중소기업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이로인해 중소기업은행과 거래하는 중소기업의 수가 8천여개에서 4년만에
2배인 1만6천여개로 늘어나는 성과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