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칼] (349) 제2부 대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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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노부는 에도성을 떠나 우에노에 있는 간에이지라는 절 안의 암자인
대자원으로 옮겨갔다.
2월12일 이었다. 그러니까 오사카에서 에도로 돌아온지 꼬박 한 달만
이었다.
그 조그마한 암자에서 그는 죄를 뉘우치고,벌을 달게 받겠다는 뜻으로
근신하는 칩거생활을 시작하였다. 어떻게든지 목숨만은 구해 보겠다는,
치사하다면 치사한 마지막 안간힘인 셈이었다.
요시노부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가쓰야스요시는 먼저 전열 재정비에
착수했다. 에도에 남아있던 군사와 오사카로부터 몰려온 패잔병들을
재편성하여 동정군을 맞아 싸워서 에도를 방어할수 있는 태세를 갖추게
하였다. 만약 방어가 무너지고,동정군이 에도시내로 진격해 들어왔을
경우에는 온 시가지에 불을 질러 그들이 불바다 속에서 모조리 타죽도록
하는 작전까지 세웠다. 결사 항쟁인 셈이었다.
그러나 황군과 전쟁을 계속하기 위한 조치는 물론 아니었다. 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일단 그와같은 결전 태세를 갖추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처럼 항쟁 준비를 하면서 한편 가쓰는 유신정부에 탄원서를 보냈다.
탄원서는 두 통이었다. 요시노부의 이름으로 된것과 막부의 여러 중신들의
연명으로 된 것이었다.
요시노부의 이름으로 된것에는 지난번 토살장을 제출하여 후시미와 도바
에서 싸움을 벌인 일에 대해서 사과하고,잘못을 뉘우치는 뜻으로 쇼군자리
에서 물러나 지금 에도성을 떠나서 우에노의 간에이지에서 근신 칩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아무쪼록 무고한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도 동정군의 에도 공격을 중지해 달라는 탄원을 적었다.
그리고 중신들의 연명으로 된 것에는 요시노부가 진심으로 전과를
뉘우치고 공순의 길로 들어갔으며,그는 원래 황실에 대하여는 추호도
불충을 하려는 생각이 없어서 대정봉환이라는 큰 결단까지 내렸던
터이니 그의 충성심을 의심치 말고,도쿠가와 막부 삼백년의 공훈도
참작해서 관대한 조치를 내려달라는 청원)을 기술하였다.
그러나 그 두 통의 탄원서 역시 묵살 되었다. 이미 친정이 선포되어
삼만의 동정군이 세 갈래 길로 진군을 개시한 마당에 그런 원론적이고
막연한 탄원서가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다.
그 탄원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오쿠보도시미치는, "무조건 항복을
하고,요시노부가 스스로 셋푸쿠를 한다면 모를까."하고 내뱉었다.
대자원으로 옮겨갔다.
2월12일 이었다. 그러니까 오사카에서 에도로 돌아온지 꼬박 한 달만
이었다.
그 조그마한 암자에서 그는 죄를 뉘우치고,벌을 달게 받겠다는 뜻으로
근신하는 칩거생활을 시작하였다. 어떻게든지 목숨만은 구해 보겠다는,
치사하다면 치사한 마지막 안간힘인 셈이었다.
요시노부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가쓰야스요시는 먼저 전열 재정비에
착수했다. 에도에 남아있던 군사와 오사카로부터 몰려온 패잔병들을
재편성하여 동정군을 맞아 싸워서 에도를 방어할수 있는 태세를 갖추게
하였다. 만약 방어가 무너지고,동정군이 에도시내로 진격해 들어왔을
경우에는 온 시가지에 불을 질러 그들이 불바다 속에서 모조리 타죽도록
하는 작전까지 세웠다. 결사 항쟁인 셈이었다.
그러나 황군과 전쟁을 계속하기 위한 조치는 물론 아니었다. 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일단 그와같은 결전 태세를 갖추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처럼 항쟁 준비를 하면서 한편 가쓰는 유신정부에 탄원서를 보냈다.
탄원서는 두 통이었다. 요시노부의 이름으로 된것과 막부의 여러 중신들의
연명으로 된 것이었다.
요시노부의 이름으로 된것에는 지난번 토살장을 제출하여 후시미와 도바
에서 싸움을 벌인 일에 대해서 사과하고,잘못을 뉘우치는 뜻으로 쇼군자리
에서 물러나 지금 에도성을 떠나서 우에노의 간에이지에서 근신 칩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아무쪼록 무고한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도 동정군의 에도 공격을 중지해 달라는 탄원을 적었다.
그리고 중신들의 연명으로 된 것에는 요시노부가 진심으로 전과를
뉘우치고 공순의 길로 들어갔으며,그는 원래 황실에 대하여는 추호도
불충을 하려는 생각이 없어서 대정봉환이라는 큰 결단까지 내렸던
터이니 그의 충성심을 의심치 말고,도쿠가와 막부 삼백년의 공훈도
참작해서 관대한 조치를 내려달라는 청원)을 기술하였다.
그러나 그 두 통의 탄원서 역시 묵살 되었다. 이미 친정이 선포되어
삼만의 동정군이 세 갈래 길로 진군을 개시한 마당에 그런 원론적이고
막연한 탄원서가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다.
그 탄원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오쿠보도시미치는, "무조건 항복을
하고,요시노부가 스스로 셋푸쿠를 한다면 모를까."하고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