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쇼인은 사쓰마 출신으로 시마즈나리아키라의 딸이니, 유신정부의 실권자
세 사람 가운데 하나인 사이고다카모리에게 작용을 할 수 있을게 아닌가.
사이고는 시마즈나리아키라의 심복 부하였으니, 고인이 된 주군의 딸이
자기에게 부탁을 하면 그 청을 외면하지는 못할게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세이간노미야는 병산지 암살인지 좌우간 지금은 저승에 가있는
고메이천황의 누이동생으로, 메이지천황의 고모 뻘이니, 직접 천황에게
호소하여 사태를 원만히 해결할 수도 있을게 아닌가.

두 여인이 자기 뜻을 받아들여 나서 주기만 하면 일이 의외로 잘 풀릴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요시노부는,

"됐어, 됐어"
하고 혼자 좋아서 무릎을 치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요시노부는 덴쇼인과 세이간노미야를 설득할 명분까지 생각해
냈다. 역적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역사에 역적으로 기록되지 않기
위해서 공순의 길을 택하기로 했다면 체면도 서고, 설득력도 충분히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것은 두 여인을 설득하기 위한 명분일 뿐 아니라, 실제의 그의 진심
이기도 했다. 요시노부는 결코 자신의 권력을 위해 역적의 오명을 남겨도
좋다는 그런 배짱은 가지고 있질 않았다. 충신은 못될망정 역적이 되다니,
될 말이 아니었다.

그의 그런 마음가짐은 천황사상의 본 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미도번
출신이고, 또 자기 아버지인 도쿠가와나리아키가 철저한 천황 숭배자였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자연히 몸에 밴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배안에서 그렇게 마음을 굳히기는 했으나, 요시노부는 그런 생각을
일행인 중신들 아무에게도 내비치지 않았다. 부하 군사들을 속이고 야반
도주를 하여 에도로 향하는 터이라 모두 눈에 핏발이 서 있어서 그런 소리
를 들으면 어떤 자가 대검을 빼들고 덤벼들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가이요마루가 에도의 시나가와 항구에 닿은 것은 십일일 저녁이었는데
그날밤은 배에서 자고, 이튿날 새벽에 요시노부는 중신들과 함께 상륙
했다. 그리고 말에 몸을 싣고 아직 먼동이 트지 않아 새벽 어둠에 묻힌
거리를 달려서 에도성으로 들어갔다.

빠까빡 빠까빡... 달려 지나가는 말발굽 소리를 더러 잠자리 속에서
들은 백성들도 있었으나, 그것이 쇼군 요시노부 일행이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