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D연수생으로 선발된 기쁨을 가슴에 간직한채 미국으로 떠나기전 3개월간
영어회화와 서양문화나 관습등을 공부했다. 동양사람은 남존여비문화속에
살고있으나 서양사람은 "레이디 퍼스트"라는 관습을 갖고 있으므로 우리도
미국에 가면 여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엘리베이터를 탈때나 내릴때도
"레이디"부터 먼저 들어가게 하고 먼저 내리도록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고
배웠다.

이같은 "레이디 퍼스트"의 생활관습은 특히 유럽에서의 전쟁문화가 낳은
역사적 소산이라는 강의를 들은 기억이 난다.

유럽의 돌성곽은 성둘레에 운하를 파 적의 침입을 어렵게 했는데 적이
쳐들어오면 이곳에 놓인 다리를 들어올리도록 되어있어 이것이 힘센 남자가
여자에게 문을 열어주는 관습의 첫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성문과 성안에
있는 각방의 문 역시 안전문제를 고려,육중하게 만들어져 있어 여자의
가냘픈 손과 팔로는 도저히 열고 닫을수 없기 때문에 남자가 열어주고
닫아줘야 했던 것이라는 강의를 들으며 서양관습을 하나하나씩 이해해
나가기 시작했다.

또 전쟁이 나면 종족을 보전하기 위해 여자들을 안전한 곳으로 미리
대피시켜 놓았는데 이 또한 "레이디 퍼스트"라는 생활습관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후일 영국의 윈저성에 구경갔을때 그 성안에 있는 방문들이 여자의
힘으로는 열기 어려울 정도로 육중한것을 보고 "레이디 퍼스트"의 유래를
실감할수 있었다. 59년8월31일로 예정됐던 미국연수는 사라호태풍으로
하루연기돼 다음날인 9월1일 김포비행장에서 안상국조사역(한은부총재역임)
을 포함한 일행 17명과 같이 생후 처음 당시의 프로펠러비행기를 탔다.
일본 도쿄에서 1박한후 괌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영화
에서나 보던 60층빌딩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미국은 별천지구나"라는
인상을 받았다.

댈라스에 기착했다가 워싱턴에 도착한후 미국역사와 미국생활에 관한
연수를 받았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끊임없는 대타협의 정치적 역사라는
강의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정치적 망명과 가난에 쫓겨 이민온 사람들이
만든 미국은 민족간 갈등을 정치적 타협으로 해결하고 오늘을 이룩했다는
설명을 들으며 어느나라든 모든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수는 없다는 것을
되새겼다.

30년전 내가 경험한 워싱턴에서의 인종차별은 오늘과는 비교가 되지않을
정도로 심했다. 당시 워싱턴의 중국식당에 함께갔던 이티오피아출신
연수생이 쫓겨나 "이런 대우를 하는 미국에서 연수받을 필요가 없으니 즉시
귀국하겠다"고 소리치며 항의하던 광경을 아직도 잊지못하고 있다.

나의 미국연수동료는 흑인가에 방을얻어 거주하는 아프리카에서 온
연수생,백인가에 방을 얻은 남미에서 온 여성 연수원등 각국에서 온
약25명과 같이 메릴랜드에 위치한 미상무부 통계청(뷰로 오브 센서스)에
통근버스로 출퇴근하던 연수생활이 지금도 이따금 생각난다.

미국무부에서는 고등교육을 받고 정부에서 선발된 각국의 AID연수생에게
각별한 대우를 해주었다. 그중 하나가 청강생으로 대학에 등록을 해준다는
것이다. 무슨과목이든 원하는대로 공부할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 미국유학을 가는 사람들을 보고 몹시 부러워 했고 나도
기회만 있으면 미국유학을 가겠다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게되었고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온 덕으로 유엔
매뉴얼을 해득,물가지수를 개편할수 있었던 것이다. 남이 하기어렵고,남이
하기를 꺼려하는 일을 했기때문에 내가 미국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메리칸대학원 경제발전과목과 금융과목에 등록했다. 미국에서도
야간청강생으로 주경야독을 다시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청강생으로 시험까지 보는 공부를 끝까지한 사람은 조리제박사(현
하와이대 동서문화센터부총장)와 나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