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히틀러의 생가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아돌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국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히틀러는 1889년4월20일 오스트리아의 에라우나우라는
독일과의 국경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로이스는 오스트리아 국경
세관의 차장이었고 어머니도 오스트리아인이었으니 아돌프 히틀러는
완전무결한 오스트리아인이었다.
히틀러는 아버지가 옆도시 린츠로 전근하자 그곳에서 실업고교를 중퇴할때
까지 보냈다. 19세때에 수도 빈으로 가출,미술가에의 꿈을 키웠으나 대입에
실패해서 좌절했다. 부모가 남긴 은급과 유산을 탕진하고 독신자 합숙소
에서 정부의 은혜로 생계를 이었다. 징집연령에 달하자 병역을 피해 24세때
에 조국을 버리고 독일로 도피했다. 이듬해에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에 입대,종전이 되자 병장계급장을 달고 제2의 고향 뮌헨으로 귀환
했다.
독일의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가 총통취임초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이 조국
오스트리아 침공이었다. 그는 자신의 출생지 에라우나우에 6만5,0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개선한 다음 오스트리아를 병합해버렸다(1938.3).
유럽대륙을 4분해서 통치해온 대오스트리아 제국은 산산조각이 났다.
오스트리아를 유럽대륙의 한소국으로 만들어버린 것도 바로 히틀러의
침공에 의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자존심은 오스트리아가 낳은 한
사나이에 의해 여지없이 뭉개진 것이다.
에라우나우에는 지금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제일 먼저
안내되는 곳은 물론 히틀러의 생가인 3층 아파트. 고색이 창연하지만 엷은
오렌지색 페인트로 곱게 단장되어있다. 그의 부모가 결혼식을 거행한
뾰족탑교회도 그대로 남아있다. 히틀러가 소년기를 보낸 린츠시에는
200평쯤의 히틀러가가 그대로 남아 공공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고 경사진
아래쪽에는 깨끗하게 다듬어진 공동묘지속에 히틀러 양친의 묘가 우뚝
솟아있다.
어제부터 일제가 건조한 옛 총독부관저를 허물고 있다. 멀지않아
총독부로 쓰였던 국립박물관도 부순다고 한다. 일제의 총독들이 관저로
이용한 기간보다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이 청와대로 쓴 기간과 신생한국의
중앙청으로 쓰여진 "역사"가 더 긴데도 말이다. 우리의 "현대사" 한부분이
흙속으로 묻혀가고 있는데도 아무 말이 없다.
없는 인물이다. 히틀러는 1889년4월20일 오스트리아의 에라우나우라는
독일과의 국경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로이스는 오스트리아 국경
세관의 차장이었고 어머니도 오스트리아인이었으니 아돌프 히틀러는
완전무결한 오스트리아인이었다.
히틀러는 아버지가 옆도시 린츠로 전근하자 그곳에서 실업고교를 중퇴할때
까지 보냈다. 19세때에 수도 빈으로 가출,미술가에의 꿈을 키웠으나 대입에
실패해서 좌절했다. 부모가 남긴 은급과 유산을 탕진하고 독신자 합숙소
에서 정부의 은혜로 생계를 이었다. 징집연령에 달하자 병역을 피해 24세때
에 조국을 버리고 독일로 도피했다. 이듬해에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에 입대,종전이 되자 병장계급장을 달고 제2의 고향 뮌헨으로 귀환
했다.
독일의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가 총통취임초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이 조국
오스트리아 침공이었다. 그는 자신의 출생지 에라우나우에 6만5,0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개선한 다음 오스트리아를 병합해버렸다(1938.3).
유럽대륙을 4분해서 통치해온 대오스트리아 제국은 산산조각이 났다.
오스트리아를 유럽대륙의 한소국으로 만들어버린 것도 바로 히틀러의
침공에 의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자존심은 오스트리아가 낳은 한
사나이에 의해 여지없이 뭉개진 것이다.
에라우나우에는 지금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제일 먼저
안내되는 곳은 물론 히틀러의 생가인 3층 아파트. 고색이 창연하지만 엷은
오렌지색 페인트로 곱게 단장되어있다. 그의 부모가 결혼식을 거행한
뾰족탑교회도 그대로 남아있다. 히틀러가 소년기를 보낸 린츠시에는
200평쯤의 히틀러가가 그대로 남아 공공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고 경사진
아래쪽에는 깨끗하게 다듬어진 공동묘지속에 히틀러 양친의 묘가 우뚝
솟아있다.
어제부터 일제가 건조한 옛 총독부관저를 허물고 있다. 멀지않아
총독부로 쓰였던 국립박물관도 부순다고 한다. 일제의 총독들이 관저로
이용한 기간보다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이 청와대로 쓴 기간과 신생한국의
중앙청으로 쓰여진 "역사"가 더 긴데도 말이다. 우리의 "현대사" 한부분이
흙속으로 묻혀가고 있는데도 아무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