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관리가 기로에 서있다. 실명제로 신음하는 중소기업을 지원하기위해
돈을풀어야 하는 반면 풀린 돈은 시간이 지나면서 물가를 자극할 가능성이
높아 통화정책이 진퇴양난의 어려움을 맞고있다. 기로에 선 통화관리를
두차례로 나눠 진단한다. <편집자>

실명제가 기습적으로 실시된 지난 8월의 통화관리는 "발권력을 동원한
위기타개"로 요약할 수있다. 김명호한은총재는 실명제가 실시된 지
열흘후인 지난달 23일 확대연석회의에서 통화목표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고 그결과가 8월 총통화증가율 20. 3%로 나타났다.

통화증가율 20.3%는 지난 90년 10월(20.7%)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한은은 이달 통화목표도 연초 계획보다 2%포인트 높은 19%대로 설정했다.

최근의 통화관리는 실명제로 고통을 겪고있는 중소기업을 지원하기위해
어쩔수없이 느슨해지고있는 상황이다. 실명제 이후 긴급경영안정자금을
1조8백30억원 지원키로 되어있고 지준관리나 통화채발발행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있다. 평소처럼 돈줄을 죌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사실 실명제가 시행되면서 돈을 더 푸는 것은 당연한 일일수있다.
사채시장이 죽고 돈이 돌지않아 절대량을 늘릴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다.
현재의 통화관리방식은 고전학파가 정립해놓은 화폐수량설에 기초하고있다.
이는 실물거래를 무리없이 충족시키기위한 유동성은 돈의 절대량과 그
돈이 돌아가는 속도로 결정 된다는 원칙을 기초로 한것이다. 실명제는
돈이 흘러다니는 속도(유통속도)를 떨어뜨렸다. 실명제이후 현금통화가
1조2천6백90억원이 늘어날 정도로 영세상인이나 개인들이 현금을
움켜쥐고있고 거액의 검은 돈은 금융기관에서 고개를 숙인채 움직이지
않고있다.

김영대 한은자금부장은 "실명제의 조기정착을 위해 중소기업을 적극
지원해야하고 전반적으로 돈이 잘돌지않아 절대량을 늘릴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돈을 어느정도 더 풀어야한다는 의견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돈이 풀려도 영세상인의 실명제고통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수도 있고
풀린 돈이 다니면서 인플레심리를 자극할 경우의 부작용이다.

지난달 서울지역부도업체가 3백40개로 전월보다 73개로 늘어난데서
알수있듯이 이미 중소기업의 신음은 깊어가고있고 이달은 더욱 불안한
상황이다. 최대 자금수요기인 추석이 월말과 겹쳐있는데다
실명전환의무기간이 끝나는 10월12일을 향해 불안한 발걸음을 떼어놓아야
하는 시점이다. 한은은 이달 통화증가율을 19%수준으로 높여잡은 만큼
우려할 만한 사태는 없을 것으로 전망하고있으나 금융계나 업계에서는
실명제의 쇼크가 언제 어떻게 몰아칠지 알수없는 상황이어서 자금시장을
극히 불안하게 보고있다.

통화증발로 인한 물가불안우려도 심각하다. 한은이 발표한 "거시
계량경제모형을 통한 정책파급효과분석"에 따르면 총통화가 5%를 늘경우
첫해엔 물가자극효과가 적지만 2차년도부터 현재화돼 4~5차년도에는
물가상승폭이 1.2%(GNP디플레이터기준)까지 확대될 것으로 조사됐다.

물론 고전학파의 화폐수량설을 원용할 경우 유통속도가 떨어지면
절대공급량이 늘어나더라도 물가에 중립적이어서 최근의 통화증발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도있다. 설령 이주장에 공감
하더라도 실명제충격이 사라지고돈흐름이 정상화된후 풀린 돈을 쉽게
거두어 들이지 못할 가능성이 커 물가불안심리를 가라앉히기 어렵다.
8월말 현재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연간억제 목표선(5%)에 바짝
접근해 있는데다 내년초 물가관리가 어려운 판이어서 더욱 그렇다.

이런 점을 감안,일부에선 나라금고지기인 한은총재가 금고문을 너무
안일하게 열었지 않았느냐고 지적하고있다. 실명제라는 다분히 정치적인
조치의 충격을 금융에서만 떠맡아 물가라는 중요한 경제변수를 놓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