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람들은 충렬왕부터 충정왕에 이르는 6대 76년동안 원의
"사위나라"(부마국)가 되어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몽고의 조공물 요구는 종류도 많았고 수량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백성들을 제일 괴롭혔던 것은 처녀들과 환관들을 바치라는
요구였다. 그래서 조혼의 풍속까지 생겨난 것이라니 당시 백성들이 당했던
고통을 어느정도 짐작해 볼수 있다.

북경에 끌려간 공녀들은 원왕실이나 귀족의 처첩, 시비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중 가장 잘풀린 경우는 순제의 두번째 황후가된 행주인
기씨를 꼽을수 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다시 조국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죽어갔다. 그러나 환관들은 달랐다. 기회만 닿으면 황제의 사신이 되어
귀국, 한이라도 풀어 보려는듯 권력을 휘두르고 행패를 부렸다. 사실
고려가 이들때문에 당한 피해는 상당히 컸다.

조선조가 들어섰지만 초기에는 이 폐습이 그대로 이어졌다. 명나라에서도
"인간조공"을 여전히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조정은 이 문제를 골머리를
썩여야 했다.

"세조실녹"에는 노비출신으로 명나라에 끌려갔다가 수십년만에 황제의
사신이 되어 돌아와 임금에게 온갖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위세를 부리는
두명의 조선인 환관들의 이야기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1468년 2월24일,온양행궁에 머물고 있던 세조는 황제의 사신인 태감
강옥과 김보가 한양을 향해 출발했다는 보고를 받고 사신영접준비를
시작한다.

강옥의 고향인 공주와 김보의 고향인 장단에 사람을 보내 아직 살아있는
그들의 부모 형제 친척을 조사하도록 했다. 강옥의 매부 두명은 군역을
면제해주고 그집에 쌀5석씩을 주었다. 김보의 아비와 친척들에게도 쌀을
내렸다.

개성부와 벽제역에 그들의 친척들을 나누어 보내 맞이 하도록하고
잔치상도 준비시켰다. 병이든 김보의 어미에게는 의원을 보내 치료해
주도록했다. 공주에 있는 강옥의 본가도 말끔히 수리해 놓았다.

그러나 한양을 향해 오고 있는 이들에게서 들려오는 소문은 별로 유쾌한
것이 못됐다. 황주에서는 기생집에 머물며 노닥거렸다. 체모있는 중국인
사신들은 전해도 극구사양하고 안했던 짓이다. 김보는 봉산에 이르러
군수가 읍만하고 절 하지 않았다고 사모를 벗기고 책망하면서 "고향사람
이니 용서한다"고 거드름을 피웠다.

4월9일에야 한양에 도착한 이들을 세조는 백관을 거느리고 나가 모화관
에서 맞았고 경복궁에서 의식에 따라 칙서를 받았다. 칙서는 지난해
9월 건주지역에 1만여명의 군대를 보내 명에 반역한 야인집단을 토벌한
공을 기려 하사품을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들은 비록 명나라 조정에서 보냈다하더라도 원래 이나라 백성입니다.
어찌 감히 전하와 마주 앉겠습니까. 노예신분의 천인인데 이처럼 후하게
대해주시니 감극합니다"
겉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이들의 요구사항은 날이갈수록 늘어 가기만
했다. 명나라에 가있는 화자(환관)12명, 궁인9명의 친족을 모두 불러달라고
했다. 자신들이 황제에게 진헌할 토표 매 개 활과화살 송이버섯균 새까지
준비해 달라고 떼를 썼다. 데리고온 두목 30여명을 이끌고 김강산에
다녀오겠다고하기도 했다.

강옥은 중이된 조카를 환속시켜 관직을 주고 양반집안에 장가들여 전답과
집, 노비를 내려줄것을 청했다. 김보도 어미에게 집한채, 관직을 받은
아비와 형에게도 대궐가까운곳에 집한채를 달라고 졸랐다. 명나라에 간
궁인들의 족친들에게도 관직을 주거나 자급을 올려줄것을 요구했다.
심지어 이들은 세달 남짓 자신들을 돌보아준 조선의 관리4명에게 당상관을
제수해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사신이 날로 구하고 청하는 것으로 일삼고 조금도 돌아갈 생각이
없으니."
대신들이 이렇게 걱정해도 세조는 눈한번 깜짝하지않고 사신들의 요구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확인해가며 들어주었다. 대신들의 반대에도 아랑곳
없이 사신들을 돌본 4명을 당상관으로 승직시켜 버렸다.

세조가 울면서 하직인사를 하는 두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했다는 말의
의미를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의문이다.

"언무진 의무궁"(말로도 다할수없고, 마음으로도 다할수 없다.
<부국장대우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