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5일-해방의 감격을 안겨준 그날이 벌써 48년전의 일이 되고 말았다.
호소카와(세천호희) 일본총리는 취임후 첫 기자회견에서 "지난번 전쟁은
침략전쟁이었으며 잘못된 전쟁이었다고 인식하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
실로 명쾌한 답변이었다. 일본의 역대총리들이 하나같이 소위 "대동아"
전쟁이야기만 나오면 갑자가 말을 더듬거나 말의 뜻을 희석시키기 위해
우물거리던 모습과는 판이했다.

하기야 세천총리가 지난번 전쟁을 "침략전쟁"이라고 규정했다해서 없던
침략성이 갑자기 나타난것은 아니다. 일본이 무력에 의해 아시아를 정복
하고자 한 꿈은 아득한 4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요토미(풍신수길)는 1587년에 이미 아시아대륙 침략계획이란 것을
수립해 놓고 전국에서 무인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7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친끝에 1592년4월 15만대군을 부산포 앞바다에 밀어내었다. 부산성과
동래성은 열흘도 버티지 못한채 무너졌고 조선의 관군은 도망다니기에
바빴다. 전선사령관격인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이 이끄는 침략군은 말
그대로 파죽지세로 상정했다. 20여일만에 한양성(서울)이 함락됐고 가등은
함경남북도를, 소서는 평양성을 점령했다. 기고만장한 풍신은 이 침략전쟁
을 "북경상락"이라 했고 조선침범을 "정명가도"설정이라고 빙자했다.

이때에 공표한 풍신의 "대륙 경영방안"이란게 가관이다.

"일본의 제위는 황태자에게 맡기고 천황을 명의 수도 북경으로 옮기며,
주변 10개국을 속국으로 한다. 본인(풍신)은 화남의 대 무역항 영파(링포)
를 거소로 하고 수차(그의 아들)를 명의 대장군으로 한다. 조선의 수도
에는 우희 수가나 다른 가신을 앉히고 이번 원정의 선봉장인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은 천축(인도)도처의 나라를 하나씩 떼어준다." 침략자의 백일몽
이었다.

풍신은 이 전쟁도중에 사망했고 가등과 소서등은 겨우 목숨을 건져 귀국
했다. 일본전국의 정권이 풍신으로 부터 덕천집안으로 넘어갔고 히고
(비후.지금 웅천현)의 영주 가등청정이 몰락하자 그의 영지는 고스란히
세천총리의 중흥시조에게 넘어갔다.

세천총리의 이번 역사인식의 배경에는 400년의 묶은 집안내력까지 얽혀
있음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