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에서 3B라고 하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그리고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등 세사람의
작곡가를 가리킨다. 3B에 바흐 베토벤을 포함시키는데는 이론이 없으나
브람스를 끼워넣는 것에는 과대평가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없지 않다.

이 브람스가 생존시에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의 음악을 "사기꾼 같은
수법"이라고 폄하였다니 흥미로운 일이다. 바그너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간에 우리는 바그너의 음악에 자주 접하게 된다. 흔히 결혼식장에서
신랑 신부가 입장할 때 바그너가 작곡한 "로엔그린"중의 "혼례의 합창"을
듣게되고 아이러니컬 하게도 퇴장할 때는 대개 멘델스존이 작곡한
"한여름 밤의 꿈"속에 나오는 결혼행진곡이 연주된다.

그런데 바그너는 멘델스존을 극단적으로 혐오했었다는 것이다.
멘델스존(1809~1847)은 바그너보다 시기적으로 조금 빠른 유태계 독일
작곡가.

바그너는 1850년 "신음악사보"에 발표한 "음악에 있어서의 유태주의"라는
논문에서 유태인 음악가,특히 멘델스존과 마이어베어를 맹렬히 비난했었다.
그렇게 한 동기는 여러가지가 있었겠지만 당시 무일푼이었던 바그너로서
부유한 환경에서 바그너가 보기에 "깊이 없는 찬란"으로 명성을 차지한
멘델스존을 참을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것으로 바그너의
반유태주의의 입장은 정착되고만다.

후일 아돌프 히틀러가 게르만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유태인을 무조건
비난하는데 바그너의 이같은 입장은 편리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개인적으로도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하였지만 특히 게르만민족의 전설을
바탕으로한 락극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등은 나치스의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같은 역사 때문에 지금도 유태인의 나라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의
작품이 연주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순수하게 작품으로서만 감상해야 하는 것. 우리
악단에서는 바그너의 악극이 막대한 비용과 인원,그리고 기술적인 문제로
한번도 공연된 적이 없다. 김경원씨를 중심으로 한 바그너협회의
발족으로 예술의 전당등에서 바그너 작품이 본격적으로 공연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