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년 전쟁이 끝나자 가족을 데리고 상경했다. 피난시절 제지사업으로
모은 천만환(신화폐)을 가지고 올라 왔는데 1백20만환을 주고 혜화동에
대지 42평,건평 21평의 한옥을 하나 샀다. 신혼초부터 6.25를 겪고
피난살이까지 너무나 고생시켰던 아내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까 하고
아내 명의로 집을 샀다. 그사이 처가집이 된 평화당의 복구에 처남과 함께
힘썼으며 4.6반절 인쇄기 신품한대도 사들였다. 그리고 나는 내 사업을
시작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평화당을 나왔다.

무슨 사업을 할까하고 이리저리 알아보았더니 신통한 것이 없었다.
여러가지 궁리 끝에 그래도 잘 아는 것이 인쇄업밖에 없으니 이것이 제일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와룡동에 있는 인쇄공장을 판다기에
가보았다. 집은 이왕가소유이고 시설이라고는 중고활판인쇄기 3대와
부대설비였다. 그 시설과 권리금을 합하여 1백50만환에 인수하고
삼화인쇄라는 이름으로 인쇄회사를 설립했다.

이때가 1954년12월이었다. 항상 한걸음 앞서는 자세로 자기혁신을
거듭하면서 계속 전진한다는 것이 나의 기업신조였기에 남보다 더 부지런히
열심히 뛰었다. 새벽별을 보고 집을 나와서는 밤중에 다시 별을 보며
집으로 돌아가는 나날이었다. 일이 바쁘다 보면 밥먹을 시간도 없어서
점심 굶기가 다반사였다. 어쩌다 얻어걸린 자장면 한 그릇이 그렇게
맛있을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일본에서 원색동판 제판기술을 배우고 귀국한 전차훈씨를
알게 되었다. 전차훈씨는 기술에 자신이 있으니 동업을 하자고
제의해왔다.

우리는 일단 시제품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무렵 국내에는 아직
천연색사진이 보급되기 전이어서 흑백단색사진을 원고로 해서 손으로 적색
청색 황색의 세가지 색채를 내는 판을 만들었다. 이렇게 제판한 것을
동판에 방식니스를 칠하면서 부식시키고 동판인쇄기도 없었으므로 활판기에
걸어서 인쇄를 해보았다. 여러번 시험을 거듭한 끝에 만족할만한 효과를
낼수가 있었다. 최초의 작품은 경복궁 춘당지를 담은 16절 크기의 인쇄물
이었는데 오늘날의 원색인쇄 만큼 화려하거나 선명하지는 못했지만 주로
흑백인쇄물만 대하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본격적인 원색인쇄를 하기 위해서는 최신 동판인쇄기의 설치가 시급했다.
그래서 오퍼상에게 거금 3백50만환을 주고 주문을 했다. 그러나 이때
사기를 당하여 돈만 떼이고 또 한번 발주,다시 대금을 치르고서야 도입할수
있었다.
또 한국최초로 제판기술자를 독일로 유학 보내 기술을 연마하게 했다.
이렇게해서 국내에서 원색동판인쇄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당시
원색인쇄하면 삼화라고 할 정도로 명성을 떨쳤다.
57년에는 회사를 법인조직으로 바꿔 삼화인쇄주식회사로 발족했다.
61년에는 을지로2가로 본사를 이전확장했으며 서독에서 최신
옵세트인쇄기와 사진제판시설 일체를 도입하고 제본시설까지 완비하여
종합인쇄소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시설의 완비와 기술향상으로 마침내
외국에서도 인정을 받아 일본및 미주지역에 지형 전사등의 인쇄물을
수출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로 해외시장을 개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순탄하게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기업의 측면이나
일신상에 어려운 고비도 수없이 많았다. 나에게는 아들 둘 딸 셋이
있었다. 시골에서는 내가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니까 서울로 공부하러
오는 조카들을 우리 집에 보내곤 했다. 우리 집에서 학교를 다닌 대학생이
7명이나 되어 한달에 쌀 소비가 세가마니나 되었다. 아내는 아이를 등에
업고 조그마한 계집애 하나의 도움만으로 그 시중을 다 들었다.

아침 저녁의 밥상은 물론 도시락을 싸주고 빨래를 해대는 중노동을 불평
한마디 없이 감당해냈다. 동경유학까지 갔다 온 아내가 남편 잘못 만나 그
고생을 도맡아 한것이다. 원래 말수가 적고 참을성이 많은지라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로 심한 위장병에 걸려 아내는 거의 10년이나 병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둘째딸이 감기에 걸렸다. 아내는 병석에 누워 있어서
병원에 데려다 줄 사람도 없었지만 텔레비전을 보고 놀기도 해서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밤중에 갑자기 고열이 나면서 신음을
하는 것이었다. 밤중이라 어떻게 손을 써볼 수도 없어 걱정으로 밤을
지샜는데 새벽4시에 어처구니없게도 숨을 거두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천지가 무너지는 일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감기약의 과다복용에 의한
약물중독이었다. 도대체 인생이 무엇이고,사업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단장의 슬픔이 엄습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