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때는 50일간이나 지하피신생활을 했다.

9.28수복으로 피신 생활이 끝났다. 죽은목숨이 살아났으며 이때 자유가
이토록 소중하며 고귀하다고 느낀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쇠약한
몸의 요양도 하는둥 마는둥하고 인쇄물 납품처인 대법원에 찾아갔더니
6.25전에 납품했던 대금 1백20만원을 지불해 주는 것이었다.

얼마 안가서 다시 1.4후퇴로 식솔을 이끌고 고향인 전주로 피란을 갔다.
한동안은 전시연합대학을 다니기도 했지만 생계를 위해서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대법원과의 거래로 한지제조업에 눈을 떴으니 이것을
시작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으로 온 국토가 초토화되었으니
재건하자면 창호지나 장판지에 대한 수요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한지제조는 수공업 형태이니 큰 자본도 들지않는다. 좋은 한지를 만들자면
물이 좋아야 한다. 전주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너무 벗어난 산간지에는 아직도 공비가 출몰해서
위험했다. 그래서 전주 서학동에 자리잡고 한지 공장을 차렸다. 남고산
기슭의 바위 속에서 솟아나는 약수는 수량도 풍부하고 물의 온도도
일정했다. 이 물의 권리를 얼마간의 돈으로 사서 개천가에 공장을 차리고
전주한지공업주식회사라 이름지었다. 이것이 나의 최초의 기업이었다.

순 닥나무로만 만든 한지는 극상품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쓰던 고서는
이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몇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잘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한지는 대량으로 만들기 때문에 닥나무만 가지고는
재료가 부족해서 백상지같은 것을 녹여서 섞는다. 그 당시는 아직 환도가
된지 않아 민간인은 서울에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었다. 약삭빠른
장사꾼들이 서울의 빈 집에 들어가 고서를 닥치는 대로 싣고 나와
한지공장에 팔았다. 이것을 닥나무 원료와 섞어 창호지와 장판지를
만들었다. 아무리 먹고살기 위한 짓이라고는 하나 귀중한 고서를 마구
파괴하는데 일조를 했으니 나는 문화를 파괴한 만고의 죄인이라는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제품은 많이 만들어 놓았는데 기대했던 환도는 빨리 되지 않아 판로가
걱정이었다. 당시는 여행도 함부로 못하는 시절이었으나 다행히 부산으러
갈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래서 국제시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국제지업사라는 간판이 눈에 띄어 들어가 보았다. 주인과 초면 인사를 한
후 창호지와 장판지에 대한 상담을 벌였다. 주인은 만들어 놓은 물건을
전부살테니 가져오라고 하면서 초면인데도 계약금조로 5백만원 짜리 수표를
끊어주었다.

"여보시오,떼어먹으면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큰 돈을 성큼
내줍니까"했더니 "떼어먹을 사람 같지는 않으니 물건이나 빨리 가지고
오시오"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점원 중에 고향 사람이
하나 있어서 우리 집안 내력을 안다는 것이었다. 신이 나서 돌아와 큰
트럭에 창호지와 장판지를 가득 싣고 그 트럭꼭대기에 올라타 내 전재산인
제품을 지키면서 부산까지 갔다. 계약금으로 받은 그 수표는 돌리지 않고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가 물건을 납품한 다음 잔금과 함께 찾아 썼다.

이렇게 해서 부산을 드나들게 되어 부산지방법원에 더부살이하고있는
옛납품처인 대법원을 찾아가 보았다. 가족과 헤어져 피란내려온 직원들은
셋방을 구하지 못하고 책상위에서 새우잠을 자는 형편이었다. 나는
직원들과 함께 곰탕도 먹고 대포도 받아주면서 함께 어울렸다.

하루는 직원들이 무엇을 한참 준비중이었다. 전란으로 토지나 건물의
등기부가 소실되어 그것을 복구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 예산이
인쇄비만해도 15억원이 되었다. 그전까지는 수의계약을 했었는데
이번부터는 공개입찰을 한다는 것이다. 나도 거기에 응찰을 하려고 하는데
지방업자들이 찾아와서 함께 담합하면 큰몫을 나누어 가질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부산보다는 전주의 인건비가
쌀뿐더러 품질에 대해서는 절대로 자신이 있었다. 나는 내정가격의 절반인
7억5천만원에 낙찰을 했다. 앞으로도 계속 주문을 받을수 있을 것이라는
장래성을 보고 밑지지만 않으면 되겠지 하고 덤핑가격을 써넣었던 것이다.

작업장을 확장하고 일손을 대폭적으로 늘렸다. 제지공장에서 한때 가장
많이 일했을 때에는 인원이 1백50명도 넘었다. 이렇게 많은 일자리를
마련해 줄수 있다는 것이 흐뭇했다. 사업이 날로 번창해가는 것이 기뻤다.
종이의 재료를 수집하기 위해서 충청도로 경상도로 뛰어다녔다. 큰 물량을
제조하기 위한 자금조달도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완성된 제품을 각
지방법원에 납품하면 대금은 대법원에서 일괄지불해 주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그후로도 여러차례 걸쳐서 추가 주문을 받았으며 제지사업은
서울이 환도될때까지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