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비망록] (24) 유기정 중소기협중앙회 명예회장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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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공업학교를 다니던 시절 나는 주경야독이 아니라 주독야경을 했다.
7월부터 11월까지는 밤에 과수원을 지켜야 했기때문이다. 근처에서
백여우가 출몰하여 잘익은 과일을 먹어치우는 바람에 병약하신 형님을
대신하여 단도와 목검으로 무장하고 밤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과수원을
돌면서 지키는 것이 내가 맡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일이 그렇게 무서웠다. 캄캄한 밤중에 뭣인가 금방 나타날것
같았고 비가 부슬부슬 오는 밤 멀리 도깨비불이 보일때는 등골이 오싹하여
오금이 떨어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일요일이나 방학때는 종일 뙤약볕에서 밭일을 했고 겨울방학때는 10리나
떨어진 먼산에 가서 나무를 해가지고 오기도 하였다.
젊은 나이에 병드신 형님은 나에대한 기대가 컸다. "성실히 살아라"하는
것이 형님의 가르침이었다. "내가 못한 공부를 네가 해다오"하고 격려를
해주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틈만 나면 독서를 했다. 특히 위인전에
심취했다.
6권으로된 플루타크 영웅전은 나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때마침
손기정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해 우리민족의 피를 끓게 했다.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동아일보가 폐간되자 우리의 울분은 극도에 달했다.
나는 손가락끝을 잘라 "만난을 극복하고 뜻을 이룩하리"라고 혈서를 쓰고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신할 것을 스스로 맹세했다.
공업학교를 졸업한 나는 전주전매청의 공원으로 취직했다.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당 1원30전씩 월40원을 받았다. 당시의 쌀 4가마
값이었지만 어려운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는 보람으로 열심히
일했다. 첫달 월급을 타가지고 늑막염에서 시작,폐병까지 걸리게 된
장형을 위해 등나무 안락의자를 사드렸다.
집안의 기둥이던 형이 42년 1월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셨다.
비통과 절망 속에 한동안 젖어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한 끝에 그해 5월 서울로
올라왔다. 내 나이 20세였다. 손에 든 것이라고는 현금
1백원,플루타크영웅전 6권,그리고 담요 한장뿐이었다.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내 딴에는 큰 뜻을 품고 상경 했나 그 방법도
모르겠고 그 길도 찾지 못하여 한동안 헤맸다. 얼마 안되는 돈도 다
떨어졌다.
우선 먹고 살아가면서 길을 찾기로 하고 직장을 구했다.
마침 백보환제약회사라는 곳에 사촌매형이 계셔서 거기에 임시고용원으로
나가게 되었다.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청소부터 시작하여 포장.발송은
물론 서무나 경리의 보조 일까지 시키는 대로 뭣이든 다 했다. 그런데 그
회사가 태평양전쟁 말기의 통제경제령에 걸려 문을 닫게 되었다. 그후
대륙화학연구소라는 화장품 회사에다녔다. 1년후에 백보환제 회사의
자매회사인 평화당주식회사의 인쇄부에 주임으로 발탁됐다. 전에는
월45원을 받았었는데 주임월급 1백15원 영업수당까지 준다는 조건이었다.
그때 나이가 22세였다.
나는 신이 나서 물볼을 가리지 않고 뛰었다. 물론 인쇄에 대해서는
백지였으나 나의 성실성과 능력을 인정받은 보답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해보지 않은 일이지만 이제 영업담당으로
뛰지 않을수 없었다. 맨처음 영업활동차 나간 날이었다. 마침 대법원에
고모의 외손자되는 사람이 경리계장을 하고있다기에 찾아가 보기로했다.
대법원 건물앞에 서니 우선 기가 질렸다. 간신히 그의 방을 찾았는데 그
방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핸들에 손을 대고 열까말까하다가 복도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나서 용기를 내어 문을 열었다.
경리계장은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고 자주 들르라는 것이었다. 그후로는
자잘한 인쇄물을 맡겨 주었다. 하루는 토지와 건물등기부 등본용지를
인쇄해야겠는데 할수있겠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한지 비슷한 종이에
서식을 인쇄하는것이었다. 당시는 등기부등본을 이런 서식에 직접 붓으로
써넣어 작성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선 용지가 문제였다. 일본에서 들여와 쓰던 용지가 바닥났다는
것이다. 이것을 만들수 없을까하고 전주로 내려갔다. 전주는 한지의
고장이다. 한지공장을 찾아가 시제품을 만들어 보았다. 이리저리 연구한
끝에 1주일만에 견본과 비슷한 종이를 만들수 있었다. 대법원에서는
그럭저럭 쓸만하다면서 정식 발주를 해주었다. 나는 즉시 전주에 내려가
용지를 생산하여 인쇄를 하고 제책해서 주문 전량을 납품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6.25가 터져 대금을 받을수 없게 되었다
7월부터 11월까지는 밤에 과수원을 지켜야 했기때문이다. 근처에서
백여우가 출몰하여 잘익은 과일을 먹어치우는 바람에 병약하신 형님을
대신하여 단도와 목검으로 무장하고 밤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과수원을
돌면서 지키는 것이 내가 맡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일이 그렇게 무서웠다. 캄캄한 밤중에 뭣인가 금방 나타날것
같았고 비가 부슬부슬 오는 밤 멀리 도깨비불이 보일때는 등골이 오싹하여
오금이 떨어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일요일이나 방학때는 종일 뙤약볕에서 밭일을 했고 겨울방학때는 10리나
떨어진 먼산에 가서 나무를 해가지고 오기도 하였다.
젊은 나이에 병드신 형님은 나에대한 기대가 컸다. "성실히 살아라"하는
것이 형님의 가르침이었다. "내가 못한 공부를 네가 해다오"하고 격려를
해주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틈만 나면 독서를 했다. 특히 위인전에
심취했다.
6권으로된 플루타크 영웅전은 나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때마침
손기정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해 우리민족의 피를 끓게 했다.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동아일보가 폐간되자 우리의 울분은 극도에 달했다.
나는 손가락끝을 잘라 "만난을 극복하고 뜻을 이룩하리"라고 혈서를 쓰고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신할 것을 스스로 맹세했다.
공업학교를 졸업한 나는 전주전매청의 공원으로 취직했다.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당 1원30전씩 월40원을 받았다. 당시의 쌀 4가마
값이었지만 어려운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는 보람으로 열심히
일했다. 첫달 월급을 타가지고 늑막염에서 시작,폐병까지 걸리게 된
장형을 위해 등나무 안락의자를 사드렸다.
집안의 기둥이던 형이 42년 1월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셨다.
비통과 절망 속에 한동안 젖어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한 끝에 그해 5월 서울로
올라왔다. 내 나이 20세였다. 손에 든 것이라고는 현금
1백원,플루타크영웅전 6권,그리고 담요 한장뿐이었다.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내 딴에는 큰 뜻을 품고 상경 했나 그 방법도
모르겠고 그 길도 찾지 못하여 한동안 헤맸다. 얼마 안되는 돈도 다
떨어졌다.
우선 먹고 살아가면서 길을 찾기로 하고 직장을 구했다.
마침 백보환제약회사라는 곳에 사촌매형이 계셔서 거기에 임시고용원으로
나가게 되었다.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청소부터 시작하여 포장.발송은
물론 서무나 경리의 보조 일까지 시키는 대로 뭣이든 다 했다. 그런데 그
회사가 태평양전쟁 말기의 통제경제령에 걸려 문을 닫게 되었다. 그후
대륙화학연구소라는 화장품 회사에다녔다. 1년후에 백보환제 회사의
자매회사인 평화당주식회사의 인쇄부에 주임으로 발탁됐다. 전에는
월45원을 받았었는데 주임월급 1백15원 영업수당까지 준다는 조건이었다.
그때 나이가 22세였다.
나는 신이 나서 물볼을 가리지 않고 뛰었다. 물론 인쇄에 대해서는
백지였으나 나의 성실성과 능력을 인정받은 보답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해보지 않은 일이지만 이제 영업담당으로
뛰지 않을수 없었다. 맨처음 영업활동차 나간 날이었다. 마침 대법원에
고모의 외손자되는 사람이 경리계장을 하고있다기에 찾아가 보기로했다.
대법원 건물앞에 서니 우선 기가 질렸다. 간신히 그의 방을 찾았는데 그
방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핸들에 손을 대고 열까말까하다가 복도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나서 용기를 내어 문을 열었다.
경리계장은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고 자주 들르라는 것이었다. 그후로는
자잘한 인쇄물을 맡겨 주었다. 하루는 토지와 건물등기부 등본용지를
인쇄해야겠는데 할수있겠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한지 비슷한 종이에
서식을 인쇄하는것이었다. 당시는 등기부등본을 이런 서식에 직접 붓으로
써넣어 작성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선 용지가 문제였다. 일본에서 들여와 쓰던 용지가 바닥났다는
것이다. 이것을 만들수 없을까하고 전주로 내려갔다. 전주는 한지의
고장이다. 한지공장을 찾아가 시제품을 만들어 보았다. 이리저리 연구한
끝에 1주일만에 견본과 비슷한 종이를 만들수 있었다. 대법원에서는
그럭저럭 쓸만하다면서 정식 발주를 해주었다. 나는 즉시 전주에 내려가
용지를 생산하여 인쇄를 하고 제책해서 주문 전량을 납품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6.25가 터져 대금을 받을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