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비망록] (21) 유기정 중소기협중앙회 명예회장 (9)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나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배고픔으로 점철되어있다. 보통학교(지금의
국민학교)를 다닐때는 꽁보리밥이라도 삼시 세끼 배불리 먹어보았으면
하는것이 유일한 소원이었다.
그래도 우리집은 내가 태어날 무렵까지는 상당히 부유한 편이었다.
선친께서는 "연초도가"라는 사업을 하셨다. 말하자면 봄철에 담배를
재배하는 사람들에게 영농자금을 대주고 나중에 담배로 수납을 받는
일이었다. 그런데 일제의 전매령이 내려서 우리집은 하루아침에 망하게
되었다. 담배는 모두 전매청에서만 수납하게 되어 영농자금을 회수할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돈을 관리하던 사무원이 미두(미곡의 시세를
이용하여약속만으로 거래하는 일종의 투기행위로 군산의 미두장이
유명하였음)에 손을 대어 일부 수금한 돈마저 모두 날려버렸다. 선친의
손에는 1백50여명의 연초재배자들로부터 받은 차용증서가 보관되어
있었으나 일제의 수탈정책에 말려든 농민들은 기한이 지나도 그 돈을
갚을수가 없었다. 당시 선친의 수중에 16원이 있었다고 한다. 선친은
그돈을 전부 털어서 돼지 두마리를 잡고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채무자
전원을 모아놓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 차용증서를 가지고
있으면 나도 잠을 못자고 여러분도 잠을 못 잘겁니다. 이것만 없다면
우리가 모두 편히 잘수 있지 않겠소. 그러니 나혼자 포기할수 밖에
없소"선친은 보관해 오던 문서보따리를 모두 모닥불에 태워버렸다. 그
액수가 그당시 돈으로 2만원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우리집은
끼니걱정을 할 정도로 몰락해 버렸다.
보통학교 6학년때 서울로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다. 밤열차를 타고 아침에
서울에 도착하여 낮에는 구경하고 여관에서 1박한후 그다음날 낮에 또
구경하고 밤차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 경비가 당시 2원50전이었다. 나는
월사금도 제때에 낸 적이 없는 터에 2원50전을 마련하기란 어림도 없는
일이어서 집에와서 그 말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는 중학교에 진학할
학생들은 방과후에 학교에 남아서 보충수업을 받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나에게 "2원50전도 없는놈이 무슨 중학엘 가. 너는 내일부터 보충수업도
받지마"하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된 형님이 "돈을 해줄테니 걱정말고
갔다오너라"하셨다. 며칠후 3원을 내주시면서 2원50전은 수학여행비로
내고 50전을 잡비로 쓰라고 하셨다. 나중에 알고보니 형님의 자전거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형님이 왕복 16 나 되는 과수원까지 타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것을 전당포에 잡혔던 것이다. 철이 없어서 그 돈을
받았지만 그래도 잡비 50전은 한 푼도 쓰지 않고 돌려드렸다.
서울에 와서 구경도 구경이지만 여관의 흰 쌀밥을 보니 눈이
휘둥그래졌다. 상 한가운데에 흰 쌀밥을 수북이 담은 밥통을 놓고 각자
마음대로 공기에 덜어먹으라는 것이아닌가. 나는 꽁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하던 차에 그 쌀밥을 양껏 먹고 또 먹었다. 생전처음 불룩한
배를 쓰다듬으며 일어선 것까지는 좋았지만 밖으로 나오자마자 모두
토해버렸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어 배탈이 나버린 것이다.
보통학교는 졸업했지만 중학교에 갈 처지가 못되었다. 그래서 나는
학비를 벌어서 진학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세무서 사환으로 취직했다.
월급으로 8원을 받았다. 당시 쌀한가마에 10원하던 시절이었다.
시골마을에서 시내의 세무서까지는 왕복 16 나 되었다.
2년동안 다니면서 모은 돈으로 입학금은 되겠기에 세무서를 그만두고
공업학교에 들어갔다.
우리집의 형편은 여전히 어려웠다. 나보다 13세위인 장형이 실질적인
가장노릇을 하고 있었다. 형은 5백원을 차입해서 5천평의 과수원을
조성하고 있었다. 나는 낮에는 학교에 가고 밤12시부터 새벽4시까지는
과수원 지키는 일을 맡았다. 학교까지 왕복 16 의 길을 깡보리밥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조카는 자전거 뒤에,동생은 앞에 태웠다. 비가
오는날에는 한손에 우산까지 펼쳐들었으니 그야말로 곡예사 같았다.
그래도 학교에서는 줄곧 반장을 했고 전교의 모범생이라는 교장선생님의
칭찬도 들었으며 졸업할 때에는 도지사 상까지 탔다.
졸업식 이튿날 이른아침에 학교의 소사가 우리집으로 달려왔다. 어제받은
도지사 상과 우등상장을 모조리 가지고 9시까지 학교로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졸업을 했으니 이제 학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빈손으로 학교에
갔다.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처럼 보이는 군사교관이 나를 불러 부동자세를
취하게 했다. "네녀석은 전에 연좌항의할 때부터 알아보았어. 너같이
불온 사상을 가진 놈은 고등계로 넘겨 뜨거운 맛을 봐야 돼"
그리고는 누가 그렇게 시키더냐며,내 배후라도 캐내려는 듯 질문과 욕설을
번갈아 퍼부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입을 꽉 다문채 한마디도 안했다.
저녁 6시쯤되니 그도 지쳤는지,그렇다고 나이 어린 소년을 고등계로
넘길수도 없었는지 "이 새끼 가버려"하고 소리를 질렀다. 9시간이나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던 나는 발을 옮기려는 순간 쾅하고 쓰러져 버렸다.
걸을 수가 없어 엉금엉금 기어나왔다. 누군가 내 등을 툭 치면서 "너,참
대단하구나"했다. 돌아다 보니 그는 우리의 담임이었던
구로키(흑목)선생이었다
국민학교)를 다닐때는 꽁보리밥이라도 삼시 세끼 배불리 먹어보았으면
하는것이 유일한 소원이었다.
그래도 우리집은 내가 태어날 무렵까지는 상당히 부유한 편이었다.
선친께서는 "연초도가"라는 사업을 하셨다. 말하자면 봄철에 담배를
재배하는 사람들에게 영농자금을 대주고 나중에 담배로 수납을 받는
일이었다. 그런데 일제의 전매령이 내려서 우리집은 하루아침에 망하게
되었다. 담배는 모두 전매청에서만 수납하게 되어 영농자금을 회수할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돈을 관리하던 사무원이 미두(미곡의 시세를
이용하여약속만으로 거래하는 일종의 투기행위로 군산의 미두장이
유명하였음)에 손을 대어 일부 수금한 돈마저 모두 날려버렸다. 선친의
손에는 1백50여명의 연초재배자들로부터 받은 차용증서가 보관되어
있었으나 일제의 수탈정책에 말려든 농민들은 기한이 지나도 그 돈을
갚을수가 없었다. 당시 선친의 수중에 16원이 있었다고 한다. 선친은
그돈을 전부 털어서 돼지 두마리를 잡고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채무자
전원을 모아놓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 차용증서를 가지고
있으면 나도 잠을 못자고 여러분도 잠을 못 잘겁니다. 이것만 없다면
우리가 모두 편히 잘수 있지 않겠소. 그러니 나혼자 포기할수 밖에
없소"선친은 보관해 오던 문서보따리를 모두 모닥불에 태워버렸다. 그
액수가 그당시 돈으로 2만원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우리집은
끼니걱정을 할 정도로 몰락해 버렸다.
보통학교 6학년때 서울로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다. 밤열차를 타고 아침에
서울에 도착하여 낮에는 구경하고 여관에서 1박한후 그다음날 낮에 또
구경하고 밤차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 경비가 당시 2원50전이었다. 나는
월사금도 제때에 낸 적이 없는 터에 2원50전을 마련하기란 어림도 없는
일이어서 집에와서 그 말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는 중학교에 진학할
학생들은 방과후에 학교에 남아서 보충수업을 받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나에게 "2원50전도 없는놈이 무슨 중학엘 가. 너는 내일부터 보충수업도
받지마"하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된 형님이 "돈을 해줄테니 걱정말고
갔다오너라"하셨다. 며칠후 3원을 내주시면서 2원50전은 수학여행비로
내고 50전을 잡비로 쓰라고 하셨다. 나중에 알고보니 형님의 자전거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형님이 왕복 16 나 되는 과수원까지 타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것을 전당포에 잡혔던 것이다. 철이 없어서 그 돈을
받았지만 그래도 잡비 50전은 한 푼도 쓰지 않고 돌려드렸다.
서울에 와서 구경도 구경이지만 여관의 흰 쌀밥을 보니 눈이
휘둥그래졌다. 상 한가운데에 흰 쌀밥을 수북이 담은 밥통을 놓고 각자
마음대로 공기에 덜어먹으라는 것이아닌가. 나는 꽁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하던 차에 그 쌀밥을 양껏 먹고 또 먹었다. 생전처음 불룩한
배를 쓰다듬으며 일어선 것까지는 좋았지만 밖으로 나오자마자 모두
토해버렸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어 배탈이 나버린 것이다.
보통학교는 졸업했지만 중학교에 갈 처지가 못되었다. 그래서 나는
학비를 벌어서 진학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세무서 사환으로 취직했다.
월급으로 8원을 받았다. 당시 쌀한가마에 10원하던 시절이었다.
시골마을에서 시내의 세무서까지는 왕복 16 나 되었다.
2년동안 다니면서 모은 돈으로 입학금은 되겠기에 세무서를 그만두고
공업학교에 들어갔다.
우리집의 형편은 여전히 어려웠다. 나보다 13세위인 장형이 실질적인
가장노릇을 하고 있었다. 형은 5백원을 차입해서 5천평의 과수원을
조성하고 있었다. 나는 낮에는 학교에 가고 밤12시부터 새벽4시까지는
과수원 지키는 일을 맡았다. 학교까지 왕복 16 의 길을 깡보리밥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조카는 자전거 뒤에,동생은 앞에 태웠다. 비가
오는날에는 한손에 우산까지 펼쳐들었으니 그야말로 곡예사 같았다.
그래도 학교에서는 줄곧 반장을 했고 전교의 모범생이라는 교장선생님의
칭찬도 들었으며 졸업할 때에는 도지사 상까지 탔다.
졸업식 이튿날 이른아침에 학교의 소사가 우리집으로 달려왔다. 어제받은
도지사 상과 우등상장을 모조리 가지고 9시까지 학교로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졸업을 했으니 이제 학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빈손으로 학교에
갔다.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처럼 보이는 군사교관이 나를 불러 부동자세를
취하게 했다. "네녀석은 전에 연좌항의할 때부터 알아보았어. 너같이
불온 사상을 가진 놈은 고등계로 넘겨 뜨거운 맛을 봐야 돼"
그리고는 누가 그렇게 시키더냐며,내 배후라도 캐내려는 듯 질문과 욕설을
번갈아 퍼부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입을 꽉 다문채 한마디도 안했다.
저녁 6시쯤되니 그도 지쳤는지,그렇다고 나이 어린 소년을 고등계로
넘길수도 없었는지 "이 새끼 가버려"하고 소리를 질렀다. 9시간이나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던 나는 발을 옮기려는 순간 쾅하고 쓰러져 버렸다.
걸을 수가 없어 엉금엉금 기어나왔다. 누군가 내 등을 툭 치면서 "너,참
대단하구나"했다. 돌아다 보니 그는 우리의 담임이었던
구로키(흑목)선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