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비망록] (18) 유기정 중소기업중앙회 명예회장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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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3월,동경에서 열리는 한일경제협력위원회에 참가하는 대표들이 함께
모여서 청와대로 인사를 하러 갔다. 출발에 앞서 정주영씨가 말하기를
"우리가 여기에서 의견통일을 해야겠습니다. 대통령께 특별히 말씀드릴
것이 있는 분은 말해보시오"하는 것이었다. 모두 잠자코 있는 가운데 내가
"대통령을 모시고 중소기업자 전국대회를 개최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려
한다"니까 정주영씨는 대뜸 "웃기는 소리 하지 마시오. 대기업의 모임에도
안나오시는 분이 중소기업자대회에 나오실 것 같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청와대에 당도한 후에 기회를
엿보다가 이렇게 말씀드렸다. "한말씀 드리겠습니다. 실은 오는
5월14일이 저희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의 창립 20주년 기념일인데 그때
각하를 모시고 전국대회를 치렀으면 합니다"
사실 기대를 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수십만 중소기업인들의
보람을 위해서는 나도 필사적이 될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
그렇습니까. 나가지요. 언제 어디서 합니까"하시지 않는가.
다음에 나는 김용휴총무처장관을 찾아갔다. 대통령을 모시고 전국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이렇게 말했다.
"나라의 제일 큰 어른을 모시고 잔치를 하자면 떡도 있고 술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술좀 주시오"
장관이 "그게 무슨 말씀이오"하기에 "총무처장관이 주실수 있는 것은
훈장밖에 더 있습니까"라고 했더니 "유유장은 국회의원까지 지내신 분이
그런 것도 모릅니까. 훈장도 국가의 예산이나 마찬가지로 전년에 심의를
마치고 당년에는 그 예정대로 집행을 하는 것입니다"하며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나는 떼를 쓰다시피 말했다.
"국가예산에도 예비비라는 것이 있어서 필요에 따라 집행하는데
훈장이라고 그렇게 하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기가막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본 장관은 "그래 몇개쯤 원하십니까"하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최소한 60개는 있어야 되겠습니다"했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면서도 "그렇게는 안되겠습니다만 하여튼 연구해봅시다"하기에 나는
이젠 됐구나 싶어 "잘부탁 드립니다"하며 큰절을 하고 나왔다.
이렇게 하여 82년 5월14일,중소기업자 전국대회는 세종문화회관에서
대통령을 모시고 4천5백명의 전국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중앙회발족이래
처음으로 성대히 치러졌다. 훈장을 받은사람 19여명과
대통령표창,국무총리.장관 표창등 도합 1백55명이 되어 나로서는 크게
만족할수 있었다.
이 대회가 선례가 되어 87년 창립 25주년 전국대회 행사도 대통령임석하에
크게 치러져 김탑산업훈장(정상용씨수훈)을 비롯하여 10개의 훈장과 5개의
포장이 수여되었다. 행사 후에 별실로 자리를 옮겨 수훈자를
격려하는가운데 대통령께서는 매우 기분이 좋으신지 "여러분 여기 있는
유기정회장이 공식적으로는 중앙회 회장이지만 진짜 회장은 나요"하고
웃었다. 그 만큼 전대통령의 중소기업육성에 대한 정열과 의지는 강했다.
금탑산업훈장이 공식석상에서 중소기업인들에게 수여된 것은 위의
전국대회에서가 처음이지만 그 전에 이 후장을 받은 분이 두 분 있었다.
단체장으로서 김봉재 전회장이 탄 바있고 또 한분은 대구섬유산업계의
지도자 최익성씨다. 최씨는 섬유산업협동조합연합회 회장으로서 이나라
섬유산업의 발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자비로 섬유연구소를
설립하여 섬유산업발전에 혼신의 힘을 다 바쳤다. 사실 공직에 몸을 바쳐
업계의 발전에 정성을 쏟다보면 자기사업은 자연히 소홀히 하게 되고
따라서 기업가로서는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중앙회 1,2,3대화
5대회장을 지냈던 이 종씨가 그랬고 6대에서 10대까지 맡았던 김봉재씨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최익성씨는 바로 그 전형적인
케이스라 할수 있다. 최익성씨하면 대구섬유업계의 대명사로 불릴만큼
헌신적으로 일해 온 분이다. 그 분이 갑자기 타계하게 되자 우리는 깊은
애도에 잠겼고 그 분이 마지막 가시는 길에 무엇을 해드릴 수 없을까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영전에서 명복을 빈 나는 그 길로 대구에서 서울로
뛰어올라와 당시 상공무차관이었던 금진호씨를 찾아가 최익성씨야말로
금탑산업훈장을 수여받을 자격이 있지 않겠느냐고 역설했다. 다행히
금차관의 호의어린 협조와 정부의 배려로 장례식날까지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게 되었다. 빛나는 금탑산업훈장을 고인의 영구에 걸어드리고 장중한
군악대 장송곡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영결식을 올려드렸던 당시를 회고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위진다
모여서 청와대로 인사를 하러 갔다. 출발에 앞서 정주영씨가 말하기를
"우리가 여기에서 의견통일을 해야겠습니다. 대통령께 특별히 말씀드릴
것이 있는 분은 말해보시오"하는 것이었다. 모두 잠자코 있는 가운데 내가
"대통령을 모시고 중소기업자 전국대회를 개최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려
한다"니까 정주영씨는 대뜸 "웃기는 소리 하지 마시오. 대기업의 모임에도
안나오시는 분이 중소기업자대회에 나오실 것 같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청와대에 당도한 후에 기회를
엿보다가 이렇게 말씀드렸다. "한말씀 드리겠습니다. 실은 오는
5월14일이 저희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의 창립 20주년 기념일인데 그때
각하를 모시고 전국대회를 치렀으면 합니다"
사실 기대를 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수십만 중소기업인들의
보람을 위해서는 나도 필사적이 될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
그렇습니까. 나가지요. 언제 어디서 합니까"하시지 않는가.
다음에 나는 김용휴총무처장관을 찾아갔다. 대통령을 모시고 전국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이렇게 말했다.
"나라의 제일 큰 어른을 모시고 잔치를 하자면 떡도 있고 술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술좀 주시오"
장관이 "그게 무슨 말씀이오"하기에 "총무처장관이 주실수 있는 것은
훈장밖에 더 있습니까"라고 했더니 "유유장은 국회의원까지 지내신 분이
그런 것도 모릅니까. 훈장도 국가의 예산이나 마찬가지로 전년에 심의를
마치고 당년에는 그 예정대로 집행을 하는 것입니다"하며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나는 떼를 쓰다시피 말했다.
"국가예산에도 예비비라는 것이 있어서 필요에 따라 집행하는데
훈장이라고 그렇게 하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기가막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본 장관은 "그래 몇개쯤 원하십니까"하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최소한 60개는 있어야 되겠습니다"했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면서도 "그렇게는 안되겠습니다만 하여튼 연구해봅시다"하기에 나는
이젠 됐구나 싶어 "잘부탁 드립니다"하며 큰절을 하고 나왔다.
이렇게 하여 82년 5월14일,중소기업자 전국대회는 세종문화회관에서
대통령을 모시고 4천5백명의 전국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중앙회발족이래
처음으로 성대히 치러졌다. 훈장을 받은사람 19여명과
대통령표창,국무총리.장관 표창등 도합 1백55명이 되어 나로서는 크게
만족할수 있었다.
이 대회가 선례가 되어 87년 창립 25주년 전국대회 행사도 대통령임석하에
크게 치러져 김탑산업훈장(정상용씨수훈)을 비롯하여 10개의 훈장과 5개의
포장이 수여되었다. 행사 후에 별실로 자리를 옮겨 수훈자를
격려하는가운데 대통령께서는 매우 기분이 좋으신지 "여러분 여기 있는
유기정회장이 공식적으로는 중앙회 회장이지만 진짜 회장은 나요"하고
웃었다. 그 만큼 전대통령의 중소기업육성에 대한 정열과 의지는 강했다.
금탑산업훈장이 공식석상에서 중소기업인들에게 수여된 것은 위의
전국대회에서가 처음이지만 그 전에 이 후장을 받은 분이 두 분 있었다.
단체장으로서 김봉재 전회장이 탄 바있고 또 한분은 대구섬유산업계의
지도자 최익성씨다. 최씨는 섬유산업협동조합연합회 회장으로서 이나라
섬유산업의 발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자비로 섬유연구소를
설립하여 섬유산업발전에 혼신의 힘을 다 바쳤다. 사실 공직에 몸을 바쳐
업계의 발전에 정성을 쏟다보면 자기사업은 자연히 소홀히 하게 되고
따라서 기업가로서는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중앙회 1,2,3대화
5대회장을 지냈던 이 종씨가 그랬고 6대에서 10대까지 맡았던 김봉재씨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최익성씨는 바로 그 전형적인
케이스라 할수 있다. 최익성씨하면 대구섬유업계의 대명사로 불릴만큼
헌신적으로 일해 온 분이다. 그 분이 갑자기 타계하게 되자 우리는 깊은
애도에 잠겼고 그 분이 마지막 가시는 길에 무엇을 해드릴 수 없을까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영전에서 명복을 빈 나는 그 길로 대구에서 서울로
뛰어올라와 당시 상공무차관이었던 금진호씨를 찾아가 최익성씨야말로
금탑산업훈장을 수여받을 자격이 있지 않겠느냐고 역설했다. 다행히
금차관의 호의어린 협조와 정부의 배려로 장례식날까지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게 되었다. 빛나는 금탑산업훈장을 고인의 영구에 걸어드리고 장중한
군악대 장송곡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영결식을 올려드렸던 당시를 회고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