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사 인사부에 근무하는 부장은 알뜰한 부인의 노력에 힘입어 3년전 서울
강남에 40평짜리 아파트를 마련했다.

1년전 회사를 옮기면서 받은 퇴직금으로 내부수리를 한 뒤 부장은
이전까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분야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깨끗한 벽면에 걸 그림을 한장 장만하자는 부인의 의견을 좇아 화랑에도
나가보고 주위의 얘기도 듣는 동안 자신이 알지 못했던 미술에 대해 관심이
생긴 것.

부장이 처음 마련한 것은 젊은 서양화가 씨의 판화. 내용이
재미있는데다가 나이에 비해 지명도도 꽤 있는듯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미술과 자신은 하등 상관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던 부장은 이후 신문의
미술란을 눈여겨 보는 것은 물론 가끔 전시장에도 들른다.

그러는 동안 부장은 자신과 비슷한 계기로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미술의 대중화현상은 90년대 한국문화예술계의 여러 양상중 가장 두드러진
것에 속한다.

미술은 이제 더이상 특정계층만의 소유물이나 향수대상이 아니다.

미술품의 값이 아직까지 터무니없이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더라도
많은 월급쟁이들이 집안에 달력그림이나 인쇄물이 아닌 화가의
오리지널회화나 판화를 걸어놓고 싶어한다.

또 형편이 되면 거실 한모퉁이에 자그마한 조각이라도 한 점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미술품에 대한 이같은 잠재수요의 증가는 여러 부문에서 입증된다.
사상최대의 불황기였다는 92년에도 화랑의 절대수는 증가했고 전시회 횟수
역시 줄어들지 않았다.

89년 55개에 불과했던 한국화랑협회 회원수는 92년 6개화랑이
폐업했음에도 불구하고 93년 5월현재 82개로 늘어나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기업에서 자체건물에 화랑을 만들고 있어 화랑수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물론 상황은 급변하고 있다. 미술품이 소수 특정계층의 향유물이나
투자대상이 아닌 일반의 향수물화하면서 전시회의 내용이 달라지는가 하면
인기작가의 판도도 변화하고 있다.

80년대 말까지 별도장르로서의 위치를 갖지 못했던 판화가 회화 못지 않은
독립장르로 부상한 것은 미술의 대중화가 몰고온 대표적 양상으로 꼽힌다.

미술품=고가의 소유물이라는 등식대신 미술품=장식물 또는 즐기는
것이라는 공식이 성립되면서 비교적 값이 싼 판화가 인기품목으로 떠오른
셈이다.
4월초 서울종로구관훈동 학고재를 비롯한 전국 4개화랑에서 열린
이철수판화전이 관람객이 줄을 잇는 대성황끝에 판매면에서도 성공을 거둔
것은 판화수요의 엄청난 잠재력을 드러낸 예라 할수 있다.

학고재 한군데서만 2백장이 넘게 팔린 것으로 알려진 이철수판화전의 경우
고객 대다수가 화랑주나 작가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일반인으로 밝혀져
주위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또 서울에서만 한달평균 10여차례의 판화전이 열린다. 김상구 이영애
조성애 송번수 이인화씨등 판화전문작가가 급증하고 한국화나 양화로
이름을 얻은 작가중 판화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갖는 이들도 증가하고
있다.

가나아트갤러리 그린판화랑 갤러리SP 갤러리메이등 판화전문화랑이 계속
생겨나고 유로아트등 외국판화를 수입,판매하는 곳도 많아지고 있다.

유명 작가의 작품이 아니면 안팔린다던 이상한 관행은 깨어진지 오래고
호당 10만~15만원 정도의 작가들이 새로운 인기작가대열을 형성중이다.

미술품의 대중화 일반화현상과 함께 미술품의 저가품시대가 열리고 있는
셈이다.

뭐니뭐니 해도 비싼 작품 한점을 파는것이 실속있다는 생각에 비싼 선물을
사들고 원로나 중진작가의 집을 방문하던 화랑주들이 내일의 한국화단을
이끌어갈 떠오르는 별을 찾아 헤매는것도 미술품 대중화시대의 한
표징이다.

그러나 미술의 대중화 일반화현상은 한편에서 적잖은 부작용을 낳고
있는듯이 보인다.

미술품이란 창작물이고 따라서 가격의 고하만으로 가치를 평가할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요자들이 변별력 없이 값만을 따짐으로써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사태발생의 우려를 낳고 있다.

오리지널판화인지 오프셋인쇄물인지의 구분조차 되지 않는 외국판화의
무분별한 도입,개성없이 유행에 편승해 인기있는 작품을 양산하는 "젊되
젊지 않은 작가"의 증가등은 미술품의 대중화현상이 낳은 대표적인
부작용으로 여겨진다.

"미술품 무료보급 유명작가의 그림을 액자값에도 못미치는 값에
드립니다"라는 광고의 증가는 미술품에 대한 나름대로의 판단력이나 질에
대한 변별력을 갖추지 못한 순진한 일반인들을 끊임없이 유혹할 것임에
틀림없다.

대중화가 저질화와 직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일반의 미술에 대한
관심이 헛되지 않도록 지금부터라도 미술계 전체의 공동노력이 경주돼야할
것이다.

<박성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