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년간의 긴 직장생활을 끝내는 날. 바로 그날인 20일에도
정수창두산그룹회장(75)의 일과는 보통때와 다름이 없었다.

35년간 하루도 거르지않았던 새벽산책을 하고 오전9시 출근길에 올랐다.

명일동 그룹연수원에서 가진 이임식에서도 "한국최초의 전문경영인"으로
지칭돼온 그의 표정은 마찬가지였다.

"긴 직장생활동안 큰실수 없었다는 것이 참 다행이야.잘들 해주길
바래."오랜 세월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짧은 이임사였지만 그의
목소리에서만은 반세기라는 격동의 세월이 진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1919년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고보(현 경북중.고)와
경성고상(현서울대경영대)을 거쳐 지난41년 사회의 첫발을 만주의
흥업은행에서 내디뎠다. 해방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그가 두산과 만나게
된 것은 그의 유창한 영어실력 때문이었다. 당시 적산기업이던
동양맥주(소화기린맥주)를 인수한 고박두병회장은 미군정과의 대화가
필요했고 부탁을 받은 경성고상은사인 이인기씨가 그를 추천했다.

65년부터 4년간 삼성그룹으로 외유(?)를 했던 그는 박회장의 부름으로
동양맥주사장을 맡아 본격적인 전문경영인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뒤
두차례의 그룹회장,대한상의회장으로서의 역할도 화려하다.
고교동창인 신현확씨 김준성씨와 함께 TK대부로 꼽히는 그는 정치권의
유혹도 많았으나 전문경영인으로 남기를 원했다.

즐거웠던 일만큼이나 전문경영인으로 겪어야 했던 어려움도 많았을 것이나
괴로웠던 일은 "모두 잊어버렸다"고 말한다.

자기 뜻이 그대로 반영돼 신규사업을 활발히 진행시킬수 있었던 70년대가
가장 즐거웠다고 되새길 뿐이다.

그가 전문경영인으로 가장 명예롭게 은퇴할수 있었던 것을 두산사람들은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잘라말한다. 마흔한살에 낳은 첫아들
석재씨(35)가 성인이 될때까진 직장생활을 해야겠다는 것이 "큰
목표였다"면서 웃는다. 새벽산책도 그때까지의 건강유지를 위해 시작한
것이다. 이제 그아들이 약학 박사학위를 따내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손자까지 봤으니 더 욕심이 있을게 없다.

앞으로 목표를 묻는 기자에게 "이나이에 새로운 목표는."이라며 말꼬리를
흐릴 뿐이다.

그는 고문을 맡아달라는 박용곤회장의 간청도 끝내 뿌리쳤다. 이제
책이나 좀보겠다는게 남아있는 욕심이라면 욕심인셈. 아직 맡고 있는
환경보존협회회장등 별도의 직책도 임기만 끝나면 그만둘 작정이다.
전문경영인으로서의 경험을 정리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생전에 자서전을
펴낼 생각은 없다고 한다. 거짓이 섞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스스로 전문경영인을 "영원한 기업의 한시적 관리자"로 정의하며 돌아서는
그의 모습에서 작은 체구와는 다른 커다란 그림자를 볼수 있었다.

<김정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