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피니스트 손경석씨(66.도서출판 사현각대표)의 대학전공은 정치학이다.

46년 서울대 문리대정치학과에 입학했고 54년 대학원에 들어갈때는
외교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대학원졸업후에도 24년이상 대학강단에서 정치학을 강의했다. 홍익대에
잠시 적을 두고 있다가 67년부터 75년까지는 국민대 조교수로,72년부터
91년까지는 성균관대에 출강했다.

사람들은 곧잘 "당신의 진짜 전공은 뭐냐"고 묻는다.
서가에 소장된 산에 관한 서적은 1만권에 달하지만 정치학관련 책은
60권정도에 불과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물론 그런 질문을 언짢아 하지않는다. 자신을 옹고집 산쟁이라고
생각하고 있기때문이다.

지금까지 23권의 책을 냈다. 등산이론,등산에 관련된 수필집및
번역서등이 전부다.

-산과의 첫 인연은 언제였습니까.

"효제국민학교 6학년때로 생각됩니다. 어느날 몰래 극장엘 갔습니다.
"조춘"이란 영화였습니다. 오스트리아가 주무대였는데 배경에
감탄해버렸습니다. 사실은 주연 여배우에 반한 것이지만 아름다운
산속에는 빼어난 여자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거죠.

영화를 보고난후 우리나라에도 영화속에 나오는 산이 있을거라며 찾아
나섰죠. 하루종일 걸어서 간곳이 북한산입니다.

산과의 인연은 낭만적으로 출발했다고 할수있죠"
-알피니스트들의 기본인 암벽타기는 언제 시작했나요.

"일제시대때 우리나라사람들만 가입했던 백령회라는 산악모임을 주도하던
고주형렬씨로부터 암벽타기를 배웠습니다.

동성중3학년때 산에서 만난 그분은 "어떻게 중학생이 혼자 산을 다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분과 그날의 대화를 인연으로 인수봉 선인봉등에서 3년정도
사사했습니다. 비교적 암벽을 잘 탄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죠.

그런데 당시의 암벽타기교육은 아주 엄격했습니다. 지금처럼 하루에 모두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한 코스가 끝나면 다음코스에 들어갈때까지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았습니다.

3년 사사하면서 겨우 네코스만 전수받았습니다"
-에베레스트를 첫 등반한 영국의 힐러리경은 "산이 그곳에 있어
올라간다"고 했는데 선생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사회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산에서 자유를
구가하기위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통계가 있습니다. 등산학교에서 설문조사를 했더니 등산광의
65%가 독자이거나 편모슬하에서 성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설문응답자가 아직 2천명이 되지않아 발표를 늦추고 있습니다만 꽤
설득력이 있으리라 봅니다.

제자신도 4대독자입니다. 제 어머니는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실때
침이 떨어질까봐 밥상을 머리위까지 올리셨습니다. 선친께서는 독자인
저의 일거수일투족에관심을 가지셨죠.

저는 편애받는게 싫었습니다. 아무데서나 자고 먹고 내마음대로 하고
싶어서 산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스트레스해소하고는 분명 다른
차원입니다"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셨겠습니다.

"산에 15년쯤 미쳐있던 56년도에 부모님한테 탄로났습니다. 부모님이
무척 반대하셨지만 산행은 계속됐습니다.

용문산 등산을 마치고 오는날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이 곧
돌아가시는 줄도 모르고 산을 찾았던 것이죠. "
-외국산 등정도 많으셨죠.

"공식 해외등정은 4번이었습니다. 65년 한일국교수립후 한국산악회의 1차
방일등산때 대장으로 참가했습니다.

70년에는 서울대문리대OB산악회를 이끌고 일본에 다녀왔고 74년에는
유고에서 열린 국제산악연맹회의 참가를 겸해 알프스의 몽블랑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75년에는 한국산악회 창립25주년 기념행사로 실시한 안나푸르나
정찰대의 대장을 맡았습니다. 안나푸르나등정은 한국산악회에서 파견한
공식1호 등반팀이었죠.

-우문같습니다만 외국산과 국내산을 비교하신다면.

"저는 안나푸르나와 알프스를 가서 "왜 꽃이 피어있는 한국의 산을 버리고
눈만있는 이곳산을 왔나"라고 뇌까렸습니다. 아름다운 한국의 산을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인거죠.

물론 안나푸르나와 알프스에는 웅장한 맛은 있지만 화려한 멋은 한국산에
떨어집니다.

지리학적으로 비교하면 국내산과 외국산은 설선(Snowline)이 기본적으로
다릅니다. 설선은 만년설이 드는 해발지점을 말합니다.

히말라야가 있는 아열대권의 설선은 해발 5천m이고 남극등 극권은 해발
2백m,우리나라가 속해 있는 온대권의 설선은 해발 3천m입니다. 백두산
높이는 2천7백14m이니까 우리나라에서는 만년설을 볼 수 없는 것이죠.

산의 아름다움을 비교하려면 산의 높이와 조건이 같아야 한다고 할 수
있겠죠.

저의 경우는 온대권의 산이 늘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만년설이 없어 산악인들은 섭섭하겠군요.

"우리나라 산악운동의 발전이 더딘 것은 만년설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하나 들죠. 우리나라에서 여름산을 오를때 복사열을 막기위해 큰 모자를
쓰고 갑니다.

그러나 히말라야나 알프스를 오를때는 모자도 필요하지만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겨울장비도 준비해야 합니다.

소요등산만으로는 산악운동이 크게 발전할 수 없는 것이죠"
-소요등산가와 알피니스트가 다른점은 무엇입니까.

"소요등산가는 하이힐이나 슬리퍼를 신고 산에 오를수 있습니다.

알피니스트는 바위를 탈 줄 알고 겨울산을 극복하는 능력이 있으며 스키도
탈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 산의 지리적인 내용을 파악하고 스스로 기획해서 정상에 설수 있는
사람이 알피니스트라고 할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산이 갖는 자연적인 다양한 변화를 극복할수 있는 능력과 기술을
쌓은 사람만이 알피니스트죠.

-그렇다면 한국의 알피니스트는 언제,누구부터라고 알고 계십니까.

"우리나라의 근대등산운동은 1925년 영국인들이 도입했습니다.

당시 주한영국영사인 아처가 주일영국영사인 매클리와 함께 도봉산암벽을
탔다는 기록이 2년전에 발견됐습니다.

아처영사와 임무(한일혼열아)라는 사람이 인수봉에 올라가 사이다병에
자신들이 다녀갔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거기에는 26년5월25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밖에 27년에는 박석연이라는 사람이 한국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몽블랑에
올랐다는 사실이 "개벽"지에 발표됐습니다.

이들이 제가 말씀드린 알피니스트,즉 산에 올라가는 그자체 목적만을 위한
산행이었는지는 아직 규명할 길이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보니 산에 대해 연구할 분야가 많다고 생각되는데 산이
학문의 대상이 될수 있습니까.

"프랑스에는 산악학박사가 두사람 있습니다. 괴테는 근대문명이 탄생할수
있었던 요인중 하나로 몽블랑의 초등사실을 꼽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도 이제는 산을 학문으로 도입해야 될때가 됐습니다.

우리나라사람에게는 산이 외경의 대상이 아니었기때문에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고 봅니다. 오죽하면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나왔겠습니까"
-50년이상 산행을 하셨는데 선생님께 산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저는 산길에 들어서면 심포니가 들려오는 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또
산은 살아있는 산수화가 아닙니까. 산이야말로 종합예술의 극치입니다"
-그런 산이 황폐해지고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저는 산이 황폐해진 이유가 수계보호를 하지 않아서라고 봅니다.

산위쪽에 자리잡고 있는 절 산장등에서 개울을 막고 식수로 이용하는게
대표적입니다.

윗물을 막기 때문에 산아래쪽이 황무지화되고 등산객들에게 밟혀서
황폐화되는 것이죠.

우리 산은 어느 개울에 가서도 목을 축일수 있는 것이 자랑입니다.

일본 스위스 프랑스 네팔을 가도 여러가지 이유로 알피니스트의 식수로
이용되지 못합니다.

자연보호는 쓰레기 줍는 일이 아니라 수계보호가 우선돼야 합니다"
-주말에는 등산을 다니시나요.

"북산산엘 주로 갑니다. 등산객들이 워낙 많아 피인등산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산에는 피인등산을 할만한 곳이 10여군데 있습니다.

소개를 해드리고 싶습니다만 그러면 피인등산의 의미가 없지요"
-가장 고생스러웠던 등산을 소개해 주시지요.

"56년 한라산을 처음으로 겨울등반했을때라고 생각됩니다. 등산장비가
좋지않던 시절이어서 지프에 달고 다니던 5갤런짜리 연료통에다
미군레이션박스,국민학교 운동회때 사용되던 천막등 짐무게가 50 쯤
됐습니다.

둘이 들어줘야 배낭을 질수 있었을 정도입니다. 지긋지긋했습니다.

산악인들은 산에 오를때 고생하면 다시는 오르지 않겠다고 맹세하고도 또
짐을 꾸립니다"
-아드님도 등산을 좋아합니까.

"아들은 5대독자입니다. 절대 알피니스트가 안되게 막았지요. 나 자신
너무 위험한 순간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대담=김영용편집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