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김은세공) 곽인호씨(46)의 일과는 새벽 첫닭우는 소리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목욕재계한후 20~ 30분간 참선을 마친뒤 시작된다.
곽씨는 대구시 동문동 9의36 성금사에 달린 5평남짓한 작업실에서 금과
은을 진흙반죽처럼 늘였다줄였다하며 마음먹은대로 갖가지 모양들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그의 손길이 닿을때마다 금은쇠붙이들이 형형색색으로 변한다.
곽명장의 작업실 사방 선반위에 진열된 금거북이 금오리들은 마치
살아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또 그의 손길과 정성이 깃든 갖가지
장식물들이 갓 시집온 새색시마냥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새 주인을
기다리고있다.
지난 70년 세계기능올림픽에 출전,금은세공분야에서 한국최초로
메달(동)을 획득한 곽명장은 금은세공의 외길만을 걸어온지 26년만인
지난해 비로소 기술을 인정받아 이 분야 최고의 기능인에게만 주어지는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특히 그는 도안에서부터 금형 조각 광택 알물리기(보석을 박아넣는
작업)에 이르기까지 금은세공 전공정에 걸쳐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고있다.
경북 성주에서 5남2녀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때문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18세되던 65년 대구시청 옆 성금사에 취직했다.
선배들의 잔심부름을 해주면서 틈틈이 기술을 익혔다. 새벽5시에 일어나
자정이 넘도록 작업을 하고도 혼자 남아서 1 2시간씩 연구를 하는등
기술연마에 남다른 정성을 쏟았다.
그 결과 기술습득이 다른사람보다 빠르고 정교해 성금사에 들어온지
5년만에 제4회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지난70년
세계기능올림픽대회에서 스위스 영국에이어 동메달을 차지하는 성과를
올렸다.
당시 메달을 따리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일본을 제치고 3위에
입상하여 시상대위에 섰을때 외국선수들과 키차이가 워낙 심해 관중들이
웃어버린 장면을 지금도 잊을수 없다고 곽명장은 당시를 회상한다.
비록 세계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했지만 국내에서는 아무도 그의 재주를
인정해주려 하지 않았다.
경기가 끝나고 한달쯤 뒤에 일본에서 기능올림픽의 심사위원과 감독관이
반지 도안을 하나 가지고 와서 만들어 달라고 했다.
이때 신기에 가까운 곽씨의 솜씨를 본 그들이 기술에 탄복해 스카우트를
제의해왔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서 계속 일하겠다며 이를 거절하고 성김사에 남아
연구와 후배양성에 전력을 기울여왔다.
그 결과 지금까지 그가 양성한 후배의 수는 줄잡아 30여명. 이중 12명은
국내외 각종 기능경기대회에서 입상했고 서울 대구를 비롯한 전국 각지와
일본에도 진출하는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있다.
그는 후배들에게 항상 끝마무리를 잘하라고 강조한다.
좋은 제품의 가치는 끝마무리를 잘해야 살아난다는 것이 작품을 만드는
그의 철학이다.
곽명장은 지금도 남보다 더 잘 만들기위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곽명장은 수입도 적고 고되다는 이유로 요즘 세공기술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날로 줄어들고 있는것을 안타까워했다.
<대구=신경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