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친 러시아대통령을 움직이는 핵심측근은 과연 누구인가.
워싱턴포스트지는 최근 "옐친의 젊은 친구들"이라는 제하의 분석기사를
통해 현재 러시아의 민주개혁을 주도하는 파워엘리트들을 소개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나이가 30 40대로 68년 "프라하의 봄"이 무참히 짓밟히는
것을 보고 공산체제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세대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으로
꼽히고 있다.
또 과거 공산체제에서 권력의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않았던 신선함을
지니고 있고 옐친이 어려운 시절을 보낼때 고락을 같이 한 의리의
사나이들이라는것.
루츠코이부통령이 이들을 가리켜 장미빛 꿈에 젖은 어린 친구들이라고
비웃고 있지만 옐친은 정치 경제개혁에서 외교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를 이들과 상의해서 결정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밝히고 있다.
그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게나디 버블리스(46)=옐친의 핵심 측근중 측근. 현직은 부총리이지만
비서실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옐친의 부재시 옐친은
루츠코이부통령보다는 그에게 모든 행정부 일을 맡기고 있다. 옐친과는
동향. 고향의 대학에서 마르크시즘 레니니즘을 가르치다가 88년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는 최초의 정치그룹 디스커션 트리뷴을 조직했다.
옐친과는 89년 소련의회에서 만났다. 그이후 옐친의 대변인역할을
해왔으며 러시아대통령선거시 옐친진영을 총지휘했다. 91년8월
쿠데타발발시 국회의사당건물에서 옐친과 함께 군중을 지도했다.
예고르 가이다르(35)=버블리스에 의해 옐친의 참모로 들어온 소장
경제학자. 옐친 버블리스와 매일 만나 시장경제개혁을 상의하고 있으며
가격자유화 루블자유화 보조금철폐 국영기업의사유화등 일련의 충격요법은
모두 그에 의해 추진되고있다. 12살때 프라하의 봄이 짓밟히는 것을 보고
공산체제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으며 친구가 몰래 전해준 새뮤얼슨교수의
교과서 "이코노믹스"를 읽고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에 심취했다.
사탈린과 함께 5백일계획을 작성했으나 채택되지 않자 정치권을 떠났다가
옐친의 등장으로 다시 정치권으로 돌아왔다.
세르게이 샤크레이(35)=옐친의 법률자문역을 맡고있다. 대학에서
법률조사연구를 하다가 90년 소비에트의회선거시 정치에 발을 들여놨다.
소비에트의회에서 옐친을 만났으며 지난해 12월 독립국가연합을 창설할때
버블리스및 안드레이 코지레프외무장관(41)과 함께 옐친을 수행했다.
벨루시아및 우크라이나공화국과의 협정체결을 주도했으며 러시아가
구소련의 공식적인 후계자임을 선언하는데 따른 법률적인 정당성을
옐친에게 제공했다.
빅토르 바라니코프(52)=쿠데타기간중 러시아의 내무장관으로서 경찰이
동참하지 못하도록 저지,쿠데타지도자들이 심리적 동요를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옐친은 이에대한 대가로 러시아KGB(현재는
MBR로개칭)의장에 임명했다. KGB의 숙정작업에 앞장서고 있으며 옐친의
신임이 두텁다.
예브게니 사포스니코프(50)=구소련공군사령관으로서 쿠데타지도자들의
명령에 불복,일약 민주영웅으로 떠올랐다. 독립국연합의 총사령관으로서
군부내의 옐친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있으며 옐친의 개혁에 불안을 느끼고
있는 중급장교들을 설득하고있다.
미하일 폴타라닌(62)=옐친이 어려울때에도 그를 버리지않고 대권을
잡게만든 의리의 사나이. 정치적으로 실수를해도 옐친이 용서해주는
몇안되는 측근중 한사람. 법률가 시인 신문편집인이기도 했던 그는 옐친에
대한 지지때문에 고르바초프아래서 직장을 잃었던 경력도있다.
공식적으로는 공보장관이지만 버블리스와 더불어 중요한 정책결정에는 모두
참가하고 있다는게 정부각료들의 얘기다.
[워싱턴=최완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