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대통령의 말처럼 미소의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조인은
"세계를 지배해온 공포의 하부구조를 분쇄"한 것이다. 핵전쟁의 위협과
군비경쟁의 출혈에서 인류가 해방된다는 것을 뜻하지만 그의미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것은 마르크시스트들의
명제이지만 그 "공포의 하부구조"위에서 있던 종래의 국가관계나
개별국가의 정치 경제 분화도 일대변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뜻을
함축하지 않을수 없다.
전략무기감축협정의 두문자가 스타트,시작이라는 점이 우연이 아닌것
같다. 세계사는 이제 새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늘
지속성(continuity)속에서 변화하는 것으로 어느날 아침 일어나 보니
세상이 달라졌다는 식의 일방통행은 드물다. 그러나 낡은 것이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는 긴 과정이 역사다.
절대군주국가를 대신해서 18세기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이 이른바
근대국가(modern state)를 탄생시켰다. 이 근대국가는 무엇보다
상비군체제를 갖추고 불가분 불가양의 영토를 지키면서 국가경제를
통합하는 강력한 민족주의국가였다. 이렇게 군사와 영토와 경제를 국민
주권으로 묶은 근대국가는 지난 2백여년 인류역사의 주역으로 인류문명을
발전시켜왔지만 이제 중대한 변혁에 직면하고있다. EC의 통합이 유럽에서
국가영토개념을 지도에서 없애고 있고 오늘 세계경제는
보더리스(Borderless),국경이 없다고 한다. 여기 다시 무한궤도를
달리는것 같았던 국가간의 군비경쟁이 족쇄에 채워지게된 것이다.
2차대전후 세계는 미소간의 이른바 냉전구조로 고정되었다. 이
미소냉전체제는 한마디로 미소가 서로 적대 의존하던 체제다. 상대방의
위협을 주요한 명분으로 국가통합을 꾀하고 자기영향권을 결속시켜왔다는
점에서 서로 적대함으로써 존립할수 있었다는 뜻이다. 소련이 동구를
미국등 자본주의국가의 위협이라는 구실로 결속시킬수 있었고 또 그 반대의
냉전논리가 서방세계를 결합시켜 온 것이다.
미소의 이번 전략핵무기감축회담은 상징적으로 이같은 적대 의존의 청산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인 것이다.
두사람이 줄을 맞잡고 서로 당기다가 한쪽이 지쳐서 줄을 놓아버리면
상대방도 중심을 잃게 마련이다. 소련이 개혁 개방을 내걸고
국가행동에서도 군사동기를 부차적인 수준으로 낮춤에 따라서 자본주의국가
또 그 국가관계는 모두 큰 충격을 받고있다. 이른바 세계질서의 전면적
개편이 불가피해진 까닭이다.
이 새로운 세계질서의 모습은 어떤것이 될것인가.
앞에서 국가행동기준의 우선순위에서 군사동기가 뒤로 밀려나고있는 것을
보았지만 거기 대신해서 경제동기가 전면에 나서고있다. 최근 세계경제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보호주의나 또 그 연장선상에 있는 이른바
블록화현상도 그 한표현이다. 그러나 세계경제를 축소재생산으로 몰고갈
이같은 부정적인 흐름과는 대조적으로 구 사회주의 경제권을 통합해서
자본주의세계경제의 확대재생산을 지향하는 움직임도있다. 앞으로
세계경제는 이 두 흐름간의 싸움에서 서서히 새로운 모습을 드러낼것 같다.
최근착 뉴스위크지는 일본이 동남아 일원을 엔블록으로 묶어갈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이는 바로 근대국가적인 국가이익을 중심에 둔 경제동기의
발현이다.
그러나 부시미국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대한
깊은 신뢰를 표시했다. 걸프전의 참전동맹국을 제치고 미소가
중동평화회담을 공동주최키로 한것도 그같은 새로운 양국관계의 정치적
표현이다. 미국의 실업인들이 소련을 미국경제의 새로운 프런티어로
간주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오고있다.
냉전이후의 세계가 미.소.일의 삼극체제라는 힘의 질서로 규정된다면
이가운데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보면 미.소와 "가진자 일본"이 대립하는
구조가 두드러지게 될것같다. 이런 "새 질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치 경제적으로 기존 틀의 대변혁을 몰고 올것이 너무도
자명하다. 그 한 조그만 예로 미국의 대한경제압력이 극적으로 완화되면서
일본에 대항해서 소련이나 중국에 동반진출을 요구하는 쪽으로 미국의
대한경제정책기조가 바뀔수도 있는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를 포함한 본격적인 미국의 동북아전략이 나오겠지만 우리도 새로이
우적관계를 시대흐름속에서 모색해갈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