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늦바람' 프랑스, 칸의 시선은 ‘여성’에게 쏠렸다

제77회 칸 영화제 폐막
‘여성’ 서사를 다룬 작품이 대거 수상

프랑스 문화예술계 내 미투 운동 영향도
보수적인 칸 영화제도 여성주의 힘 실어
제77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성전환 여배우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 /연합뉴스
뒤늦게서야 불기 시작한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의 나비효과였을까. 프랑스 남부 항구도시 칸에는 지난 열흘 간 바닷바람을 대신해 세찬 ‘여성주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지난 25일 폐막한 제77회 칸 국제영화제는 시종일관 여성의 연대를 응원하는 듯했다. 칸의 시선이 ‘여성’을 강하게 응시한 이유는 왜일까.

▶▶▶[관련 뉴스] 사회적 소수자 다룬 작품들 올해 칸 영화제 수놓았다
▶▶▶[관련 뉴스] 올해 칸 영화제는 '감독 없는' 한국 영화에 적신호를 보냈다

○콜걸부터 트랜스젠더까지, 칸's PICK은 여성 서사

올해 칸 영화제는 말 그대로 여성을 중심으로 한 작품들이 시상식을 휩쓸었다. 황금종려상의 영예는 숀 베이커 감독의 영화 '아노라'에 돌아갔다. 성 노동자, 이민자 등 사회적 약자를 조명해온 베이커 감독이 미국 브루클린의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는 콜걸 아노라가 러시아 갑부와 결혼하며 겪는 갈등을 담은 로맨틱 코미디다.
영화 '아노라'로 77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숀 베이커 감독. /연합뉴스
백마 탄 왕자님과 만나 신분 상승하는 신데렐라 이야기 이면을 신랄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풀어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으레 접하는 수동적인 여성이 남성에 구원받는 서사를 뒤틀었단 점에서 주목받았다. 심사위원장인 그레타 거윅은 “믿을 수 없이 인간적이고, 인도적인 영화”라고 평가했고, 그의 호명을 받아 무대에 오른 베이커 감독은 “모든 성매매업 종사자에게 이 상을 바친다”고 화답했다.

2등 작품상에 해당하는 심사위원대상 역시 여성이 풀어낸 여성 영화가 낙점됐다. 인도 여성 감독 파얄 카파디아가 연출한 '올 위 이매진 애즈 라이트'가 받은 것. 뭄바이서 간호사로 일하는 두 여성이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로, 인도 사회의 여성 문제를 다뤘다. 카파디아 감독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여성 연대의 가치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수상 소감을 전했다.
제77회 칸 국제영화제 시상식. /연합뉴스
카파디아 감독이 언급한 여성 연대의 가치는 여우주연상으로 실현됐다. 프랑스 감독 자크 오디아르가 연출해 이날 심사위원상을 받기도 한 ‘에밀리아 페레스’에 나온 아드리아나 파스,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 설리나 고메즈, 조이 살다나 4명이 공동 수상하는 이변이 벌어지면서다. 성전환 수술을 하려는 멕시코 카르텔 보스와 그를 돕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인데, 보스 역을 맡은 가스콘은 실제 성전환 여성이다.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제인 칸에서 당당하게 여배우로 인정받은 것이다.

○프랑스 미투 운동에 힘 싣는 칸?

신작 ‘메갈로폴리스’로 반세기 만에 황금종려상에 도전장을 내민 거장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귀환과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카인드 오브 카인드니스’ 등 칸 영화제 개막과 함께 수상 기대감을 갖게 한 경쟁부문 진출작들도 많았다. 하지만 올해 칸은 여성을 중심으로 소수자에 주목하고 다양성을 외치는 목소리를 담아낸 작품에 트로피를 안겼다.

적지 않은 예술이 그러하듯, 영화 역시 정치 역학의 구도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가 있다. 칸영화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미국 아카데미가 미국·백인 위주의 정치성 강한 시상식으로 유명한 것처럼 말이다. 이런 점에서 올해 칸의 선택은 최근 남성중심의 사회구조를 타파하려는 정치적 입장을 어느 정도 수용하겠다는 맥락으로 읽힌다. 여러 측면에서 보수적인 성향의 보여주며 영화계 일각의 비판을 받았던 칸 영화제의 성향을 고려하면 색다른 선택이기도 하다.
26일 칸영화제에서 '올 위 이매진 애즈 라이트'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인도 출신의 영화감독 파얄 카파디아(왼쪽 두 번째)가 여배우들과 함께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는 프랑스 문화예술계에 최근 불기 시작한 ‘미투’ 운동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는 분석이다. 프랑스는 지난해 촉망받는 배우 아델 에넬이 "영화계가 성범죄 피해를 알린 여성들을 배척하고 있다"며 돌연 은퇴를 선언하는 등 성범죄와 여성 차별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 일찌감치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던 것과 달리 프랑스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단 지적이다. 이에 ‘프랑스의 오스카’로 불리는 세자르상이 지난해 성범죄자나 관련 의혹을 받는 인사를 초청하지 않기로 하는 등 변화가 감지되는 분위기다.

이런 상황에서 칸 역시 ‘바비’를 연출한 그레타 거윅을 미국 여성 감독 최초로 심사위원장에 앉히는 등 변화 물결에 동참한 것이다. 여배우에게 히잡을 씌우지 않았단 이유 등으로 징역형을 받아 망명한 이란의 무하마드 라술로프 감독에게 특별각본상 부문을 만들어 트로피를 안긴 것도 이런 이유로 보인다. 이란 감독 알리 압바시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그린 ‘어프렌티스’는 칸 현지 시사회에서 약 8분간의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미국의 대선 주자로서의 모습보단 과거 이혼한 첫 부인을 성폭행하는 장면이 폭발적이었다.

올해 칸영화제에서 한국 영화는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2’,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초대 집행위원장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청년, 동호’가 초청받은 것 외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다만 전 세계 영화학교 학생들이 만든 단편끼리 경쟁하는 ‘라 시네프’ 섹션 초대를 받은 임유리 감독의 ‘메아리’가 여성으로 사는 삶의 진실을 마주하는 이야기를 그렸단 점에서 칸의 변화에 발자국을 남겼다.

유승목 기자

핫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