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는 그림으로, 동생은 조각으로 … 똑 닮은 남매가 함께 전시를 열었다

서울 종로구 학고재 갤러리
윤석남, 윤석구 2인전 '뉴 라이프'
서울 종로구 학고재 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에 참석한 작가 윤석남과 윤석구.
닮은 얼굴로 닮은 미소를 짓고 있는 두 작가. 다정한 모습은 언뜻 부부처럼 보이지만, 이 둘은 남매지간이다. 3남 4녀 중 1939년생인 둘째 누나와 1947년생인 여섯째 동생이 함께 전시를 열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던 어머니와 소설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두 남매는 부모의 예술 DNA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지금 서울 종로구 학고재갤러리에서는 윤석남과 윤석구의 전시 '뉴 라이프'가 열리고 있다. 두 남매가 각자의 작품을 한 곳에서 선보이는 건 이번 전시가 처음이다. 윤석구의 설치작 전시를 준비하던 학고재가 “누나 윤석남의 작품을 함께 걸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며 남매 그룹전이 성사됐다.
윤석구, A New Life (남성), 2019.
학고재의 문을 열자마자 관객을 맞이하는 건 팔을 한껏 벌리고 선 남성의 조각상이다. 마치 영화 ‘박하사탕’의 설경구를 연상시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 조각상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비례 드로잉을 본따 만들었다. 그 위에는 알록달록한 천을 덧씌웠다.

윤석구는 인체비례라는 진지한 작품에 화려한 천을 씌우는 과정을 통해 다빈치에서부터 비롯된 ‘과학만능주의’에 비판적 시선을 보낸다. 과학이면 뭐든 가능하다는 믿음이 유전자 조작, 환경 파괴 등 오히려 혼란스러운 세상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윤석구가 만든 빌렌드로프의 비너스 조각도 전시됐다. 이 작품 위에도 그는 화려한 색과 모양의 천을 덧씌웠다. 최초의 인간 조각상을 의미하는 비너스에 색을 씌우며 피곤하고 지치지만 그 모습을 가리고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의 아픔과 사회 문제를 표현했다.
윤석구, A New Life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2022.
윤석구는 이처럼 조각이나 설치작에 천을 감싸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작업을 해 온 작가다. 그는 익산의 한 산골에서 벌목을 하는 장면을 보게 됐고, 그 과정에서 반듯하고 깨끗하지 않은 비틀어진 나무들이 모두 버려지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는 버려진 나무들을 주워다 천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과정을 반복하며 나무에 새로운 생명을 주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엔 아파트에서 버려진 물건들을 주워 천을 씌웠다. 이번 전시에도 탁자와 의자 등 일상 소품들에 갖가지 천을 싸맨 작품들이 나왔다.

윤석구에게 천을 씌우는 행위는 물건에 새 생명을 부여하고 버려진 아픔을 치유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그는 과거 빛을 보지 못했던 그의 작품들에 천을 씌우기도 했다. 이번 전시 제목도 ‘새 생명’이라는 뜻을 가진 ‘뉴 라이프’로 지었다.
서울 종로구 학고재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윤석남, 윤석구의 2인전 '뉴 라이프' 전시 전경. 동생 윤석구의 조각 뒤로 누나 윤석남의 드로잉이 벽을 메우고 있다.
학고재의 가장 안쪽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누나 윤석남의 드로잉이 벽 세 면을 빼곡히 메웠다. 윤석남은 ‘아시아 대표 여성 작가’로 통한다. 여성 독립운동가 100인을 죽기 전까지 모두 그리는 작업을 오늘날까지 이어오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그의 드로잉엔 모두 시인지, 편지인지, 혹은 독백인지 모를 글들이 함께 쓰여졌다. 문학을 사랑하는 윤석남이 자신의 드로잉에 모두 서사를 부여하기 위해 글을 적어 넣은 것이다.
윤석남, 외할머니, 2001.
나무를 이용한 조각과 설치 작품을 주로 만들던 윤석남은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을 지나며 ‘아이디어가 고갈됐다’는 걸 느끼게 됐다. 곧바로 그는 모든 설치와 조각 작업을 내려놨다. 그리곤 낙서를 한다는 가벼운 마음을 갖고 드로잉을 시작했다.드로잉은 윤석남의 마음 속 응어리를 풀어줬다. 하루에 열 장을 그릴 때도, 한 장도 못 그릴 때도 있었지만 2년이란 시간을 드로잉에만 쏟으며 그는 치유받았다. 이번 전시에는 그 중에서도 윤석남이 스스로 ‘남에게 보여줄 만 하다’고 느낀 작품들만 골라 갖고 나왔다. 윤석남에게 드로잉이란 ‘완성작의 전 단계’가 아니라 그것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다. 순간 떠오르는 짧은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테크닉인 셈이다.
윤석남, 내가 기다리는 건, 2001.
그가 선보이는 그림 중에는 그네에 인물이 매달려 있는 듯한 작품이 많다. 윤석남은 ‘지상에서 딱 20cm만 떠 있었음 좋겠다’는 생각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20cm가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높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림 안에 나타나는 모든 여성은 자화상이다.

두 작가는 미술 애호가도, 문외한도 즐길 수 있는 쉬운 작품을 선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묵직하다. 그림으로, 조각으로 세상을 향한 다정한 이야기를 선사하는 다정한 남매의 전시는 5월 25일까지 이어진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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