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는 순서가 뒤바뀌었다… 김성호 작가의 '아크릴 수묵화'

[arte] 양병훈의 탐나는 요즘 화가

장지 화폭 전체에 검은색 먼저 올리고
그 위에서 유채색으로 각종 사물 그려
은은하게 올라오는 검정이 작품 매력

이달 25일 예술의전당서 아트페어 참가
오는 6월에는 화랑미술제에 나갈 예정
"팬층 늘고 인지도 높아지는 상황 체감"
김성호 작가가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작가 제공
장지 화폭 전체에 검정 물감을 먼저 칠했다. 그 위에 흰색 물감으로 식탁보를, 붉은색 물감으로 컵을 그렸다. 식탁보의 주름 부분에는 흰색 물감을 덜 올려서 아래에 깔린 검은색이 얼핏설핏 위로 비쳐보이게 만들었다. 컵 표면 위를 도구로 긁어내 컵에 드리운 그림자를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자 아래에 깔린 검은색이 화폭 전체에 걸쳐 은은하게 위로 올라오며 색감의 깊이를 더했다. 김성호 작가(45)의 '아크릴 수묵화'에 대한 설명이다.

아크릴 수묵화는 김 작가가 직접 고안한 그림 기법이다. 그는 이 기법으로 그릇, 과일, 가구 등 정물화를 주로 그린다. 사물을 그릴 때 그는 사전에 화폭 아래에 깐 검은색이 그 사물의 외곽을 따라 위로 비쳐 보이도록 한다. 사물을 먼저 그리고 난 뒤 외곽선을 그리는 통상적인 방식과 다르다. 김 작가는 "아크릴 수묵화에서 외곽선은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도 화폭 전체와 자연스럽게 어울린다"고 했다.아크릴 수묵화에는 '시간을 되깊어가는 그림'이라는 의미도 담았다는 게 김 작가의 설명이다. 일반적으로는 그림을 그릴 때 사물의 색을 칠하고 난 뒤 그 사물의 외곽선을 그리지만, 아크릴 수묵화는 이와 반대로 외곽선을 깔고 그 위에 색을 올리기 때문이다. 김 작가가 작품에 이런 의미를 담는 건 그가 전업 작가 생활을 하게 된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것과 연관 있다.

김 작가는 중앙대 한국화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미술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대학원 졸업 뒤 바로 전업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림은 잘 팔리지 않았고, 그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작업실 임대료를 1년 가까이 내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작업실에서 서러움에 북받쳐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는 그 길로 작가의 길을 포기하고 다른 생업에 종사했다. 하지만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중앙대 김선두 교수, 이길우 교수가 그를 단체전 등에 데리고 나가며 붙잡았다. 결국 그는 5년여의 방황을 끝내고 작가의 길로 돌아왔다. 미술에 대한 깊은 애정이 그를 다시 화폭 앞으로 이끌었다.

김 작가는 "내가 지금의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건 그동안 거쳐온 이런 고난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시간을 되짚어가는 그림'을 통해 지나온 세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림을 그리는 김성호 작가. 작가 제공
김 작가의 작업실은 번잡한 서울 도심의 지하철 역 근처에 있다. 그는 대학 강의 등을 마치고 가로등이 켜질 때쯤 작업실에 와 보통 새벽까지 그림을 그린다. 밤이 깊어 눈이 떠지지 않을 정도로 피곤하면 그제서야 집으로 돌아간다. 김 작가는 "5년 동안 작업을 쉬었던 것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고 힘들어도 이겨낼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런 노력 덕택에 최근 미술계에서 그의 인지도가 높아지고 있다. 김 작가의 작품 '새벽나무'는 2018년 '서리풀 ART for ART 대상전'에서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이 수상작에 대해 "재료를 다루는 기술과 형상화에 따른 탁월한 조형감각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오는 25~28일에는 서울 서초구 한가람미술관(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브리즈아트페어에 참가하고, 오는 6월에는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화랑미술제에 나간다.

김 작가는 "최근에는 팬층도 늘고 있어 더 힘을 내 작업에 매진할 생각"이라며 "마냥 유행을 타기보다는 100년 뒤에 봐도 여전히 좋을 작품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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