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수십억 쏟는데…"돈이 없다" 한국 미술관에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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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도시는 문화전쟁-100년 문화강국으로 가는 길]일본 도쿄 우에노 공원의 국립서양미술관. 지난해 3월 폴 고갱, 클로드 모네 등 19~20세기 초반 프랑스 북서쪽 브르타뉴 지역에 기반한 명화 160여 점이 약 3개월간 전시됐다. 10월엔 같은 장소에서 ‘입체파 혁명’ 전시가 이어졌다. 20세기 초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가 창안한 입체파 혁명을 다각도로 조명했던 전시로, 140여 점의 걸작이 한자리에 모였다. 파리 퐁피두센터 소장품 50여 점이 일본에서 최초 공개돼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 관람객까지 끌어모은, 단연 화제의 전시였다.
⑧'공짜 전시'의 그림자
무료이거나 5000원인 국공립 전시관람료
허접한 소장품 목록에 수준 낮은 전시 판쳐
미국은 3~4만원대 입장료가 '뉴 노멀'
유럽도 줄줄이 미술관 재정 확보해 '소장품 경쟁'
도쿄 국립미술관은 1년 내내 명작 전시
해외에서도 일부러 찾아오는 블록버스터 줄줄이
이뿐 아니다. 국립신미술관의 ‘루브르 박물관 전-사랑을 그리다’와 ‘테이트 미술관-빛, 터너’, ‘이브 생로랑 특별전’, 국립근대미술관의 ‘가우디와 사그라다 파밀리아’, ‘마나카타 시코-탄생 120주년 특별전’ 등이 모두 2023년 도쿄에서 열린 전시회 목록이다. 국내에선 1년에 이 중 하나만 열려도 화제가 될 법한 블록버스터급 전시다. 사정이 이러니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선 “도쿄는 1년 내내 전 세계 명화들이 모든다. 전시만 제대로 보고 와도 이득이다. 멀리 유럽 가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나온다. 이웃 나라 도쿄까지 여행하는 이 그림들이 왜 서울엔 못 올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근본적으로 ‘돈’에 있다. 국보급 명작 한 점의 해외여행엔 임대료, 운송료, 보험료, 관리와 복원 비용에만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이 든다. 전시당 개최 비용은 총 30억~100억원에 이른다. 아무데서나 전시할 수도 없다. 자격을 갖춘 큐레이터와 복원 전문가, 항온 항습 등을 갖춘 완벽한 전시 시설이 필요하고, 반환에 관한 국가 보증도 갖춰야 한다. 현실적으로 인적·물적 자원을 두루 갖춘 국공립 미술관에서만 전시할 수 있다는 얘기다. 도쿄 주요 국립미술관이 해외 기관들과 협업해 열린 위 전시들의 관람료는 성인 기준 2100~2300엔. 한화 약 1만9000원에서 2만8000원 선이다. 내국인 작가 전시도 1800엔 입장료를 고수한다. 입장료 수익만으로 전시 비용 전부를 감당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국민들의 높아진 문화 눈높이에 전시 수준을 맞추고, 예술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기 위해 적정 가격을 받는 것으로 풀이된다.
국내 국공립 박물관과 미술관 입장료는 공짜에 가깝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은 전부 무료 관람이고, 서울시립미술관은 “올해 열리는 모든 전시를 무료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지난 10여년간 고수해온 입장료 4000원을 지난해 5000원으로 올렸다. ‘국민 다수의 문화 향유권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기관당 매년 세금 수백 억원이 투입되지만, 안정적인 자체 수익 기반이 없으니 명화 전시를 직접 기획·유치하거나 소장품을 구입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경제신문은 창간 60주년을 맞아 지난 2월부터 7회에 걸쳐 ‘세계 도시는 문화전쟁 중’ 기획을 연재했다. 해외 ‘문화 강국’들을 찾아 이들의 강점과 성공 비결을 다뤘다. 2부 ‘100년 문화강국으로 가는 길’에서는 한국 문화 현장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을 제시한다. 그 첫 번째는 미술관과 박물관의 기형적인 재정 구조다.
‘30달러 클럽’
요즘 유럽과 미국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지난 2022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입장료를 기존 25달러(3만3800원)에서 30달러(4만600원)로 올렸다. 지난해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현대미술관(MoMA), 휘트니미술관도 입장료를 올려 30달러 대열에 합류했다. 파리 루브르박물관도 올해 초 입장료를 기존 17유로(2만4800원)에서 22유로(3만2200원)로 인상했다.
세계 미술관은 입장료 '고공행진'
3만~4만원대 입장료는 이미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의 뉴노멀로 자리 잡았다. 팬데믹으로 인한 관람객 수 감소, 인건비 상승 등으로 인한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수순이다. 당시 MoMA는 “입장료 인상이 미술관 재정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결과는 어땠을까. 지난해 MoMA 매출액은 2억5223만달러로 전년(2억3254만달러) 대비 7% 상승했다. 이전 2247만달러에 불과했던 입장료 수입이 지난해 3645만달러까지 치솟으며 성장을 견인한 결과다. 같은 기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아트 인스티튜트 오브 시카고, 휘트니미술관의 매출액도 전년 대비 증가했다.입장료가 전체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올랐다. 정부 지원이나 후원금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자체 수입으로 운영을 안정화할 수 있게 됐단 얘기다. 지난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매출액 중 입장료 비중은 13.8%로 전년(10.3%) 대비 3.5%포인트 늘었다. MoMA(14.5%), 휘트니미술관(11.2%), 오르세미술관(38%) 등 주요 미술관들도 10%를 웃도는 입장료 수입 비중을 기록했다. 이탈리아 우피치미술관의 지난 2022년 티켓 수입은 2863만유로로, 전체 매출액 3503만유로 가운데 약 81%를 차지했다.
입장료를 높여 얻은 수입은 미술관과 박물관의 본질적인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자금으로 재투입됐다. 입장료를 13유로에서 15유로로 인상한 퐁피두센터는 지난 2022년 피에르 부르디외의 사진 자료 1200여점, 미국 화가 마샤 하피프의 회화 등을 소장했다.
팬데믹 이후 위축됐던 신규 컬렉션 확보 열기도 재점화되는 분위기다. 런던 테이트갤러리는 지난 3년간 다양성을 테마로 LGBT, 디아스포라, 제3세계 작가 등 현대예술 작품 약 1000점을 입도선매했다. 지난해 영국 내셔널갤러리는 스위스 작가 페르디난트 호들러의 회화를 포함해 신규 소장품 구입에만 837만8000파운드(143억3157만원)를 쏟아부었다.
예술 복지 위해? 한국만 ‘무료 미술관’ 역행
‘무료 전시’를 외치는 국내 분위기는 전 세계 미술관 입장료가 고공행진 하는 추세에 역행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가 “국민 다수의 문화예술 향유권을 보장한다”며 수십 년째 국공립 미술관의 입장료를 대부분 세금으로 충당하고 있어서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입장료는 5000원으로, 그마저 지난해 1000원 올린 가격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는 무료 관람인 데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지난 1월 올해 전시 라인업을 발표하며 모든 전시를 무료로 진행할 계획을 발표했다.문제는 이 같은 정책이 국공립 미술관과 박물관의 기형적인 세입·세출 구조를 양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2022년 세출은 2017억원으로, 주요사업비 1546억원, 인건비 453억원 등이 투입됐다. 같은 기간 박물관이 벌어들인 수입은 35억8700만원에 불과했다. 매년 발간하는 ‘국립중앙박물관 연보’에도 소장품 구입 수(2022년 39건 119점)만 공개할 뿐, 세부적인 내용 및 비용은 기입되지 않았다. 서울시립미술관의 2022년 수입은 약 6억5800만원으로 연간 지출 154억원의 3%에 불과했다. 소장품 구입에 쓴 돈은 13억원. 서울시립미술관은 2018년 이후 5년째 연보를 발간하지 않고 있다.
지난 2022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연간 지출한 비용은 약 685억5300만원. 약 700억원에 달하는 세출을 충당할 입장료 수입은 13억2230만원에 불과했다. 인건비로 연간 110억7800만원이 빠져나가는데, 소장품 구입비는 10년째 40억~60억원 수준으로 제자리걸음 했다.
미술은 왜 공짜여야 하는가
이 같은 ‘공짜 전시’는 장기적인 문화예술 수준 향상에 장애물이 될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고 있다. 국가를 대표하는 미술관에 세계 미술사에 길이 남을 제대로 된 소장품 하나 찾아보기 힘든 것부터가 시작이다.블록버스터급 명화 전시가 국내에서 열리는 길도 꽉 막혀있다. 빈센트 반 고흐, 구스타브 클림트, 클로드 모네, 에드바르 뭉크 등 유명 화가들의 명작 전시가 해외 투어를 하려면 미술관과 갤러리, 개인 소장자들이 가진 소장품들을 한 장소로 모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작품 임대료, 항공 운송료, 보험료와 유지 보수 비용 등 최소 50억~100억원에 가까운 비용이 든다.
기본적인 입장료 수익을 확보할 수 없으니 국내에서 열리는 유명 화가 전시장엔 진짜 그림은 몇 점 뿐, 포스터나 레플리카(복제그림)로 도배해놓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부 소외계층과 청소년 등을 위한 문화 복지 혜택과 일반 관람객, 외국인 관람객에 대한 입장료 차등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국내 관람객들의 문화 수준은 글로벌 스탠다드를 뛰어넘은 지 오래인데, 허접한 전시만 판치는 꼴”이라며 “1년에 3~4번은 오직 전시 관람을 위해 도쿄에 다녀온다는 사람들이 대다수다”고 말했다.
미술관의 탄탄한 재정은 국가의 소프트 파워로 이어진다. 해외 경매 시장과 아트페어 등에서 적극적으로 소장품을 사들이고 수준 높은 전시를 지속적으로 열면 국내는 물론 해외 관람객들까지 빨아들이는 관광 자원이 되기 때문이다. 프랑스 퐁피두와 루브르, 미국 구겐하임 등은 이미 예술계를 움직이는 하나의 브랜드가 돼 중동과 아시아, 유럽, 미주 등 국경을 넘어 글로벌 분점을 내는 수준으로 진화했다. 안시욱/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