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프리즘] '기업 氣 살리기' 공약도 보고싶다

韓 첨단기술 경쟁력 추락하는데
여야는 '표' 되는 정책에만 골몰

오상헌 산업부장
좋은 소식이 있을 때마다 전화를 주던 기업인 이름이 휴대폰 창에 떴다. 반가운 마음에 받았더니, 웬걸. 걱정만 한가득이다. 그것도 ‘세상 쓸데없다’는 나라 걱정으로만.

A씨는 지난주에 나온 두 건의 한국경제신문 기사 때문에 전화기를 들었다고 했다. 18일 게재한 ‘미래 핵심기술 1위, 중국 53 vs 한국 0’과 하루 뒤 보도한 ‘與, 아빠도 한 달 출산휴가…野, 셋째 낳으면 1억 지급’.전자는 인공지능(AI), 배터리 등 64개 첨단기술 분야에서 한국이 그동안 ‘한 수 아래’로 본 중국과 인도에 크게 밀린 것으로 나타났다는 호주전략정책연구소(ASPI)의 분석 보고서다. 후자는 여야가 동시에 내놓은 저출생 대책 총선 공약을 비교 분석한 기사였고.

두 기사가 A씨의 머릿속에 하나로 얽히면서 화를 돋운 모양이다. 한국 기업 경쟁력은 추락하고 있는데, 정치권은 그저 표에 도움이 될 만한 공약만 내놓고 있으니.

“저출생 대책 필요성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당장 기업에 부담을 줄 수 있는 정책을 발표하려면 사전에 기업과 협의부터 하는 게 순서 아닌가요?”기사를 찬찬히 읽어 보니, A씨가 폭발할 만한 대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기업 인력 운용에 부담이 될 수 있는 국민의힘의 ‘유급 아빠 휴가’ 확대(10일→1개월)와 ‘유급 자녀돌봄 휴가’(연 5일) 신설이 그랬다. 아이를 낳으면 현금을 퍼준다는 더불어민주당 공약도 기업인 입장에선 찜찜할 만한 부분이다. A씨는 “매년 28조원이 든다는데, 어디서 나오겠느냐”며 “결국엔 법인세, 소득세 올려서 대기업과 고소득자에게 물릴 게 뻔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민주당이 그동안 낸 총선 공약(요양병원 간병비 급여화, 온 동네 초등 돌봄, 경로당 주 5일 점심 제공) 재원도 나올 구석은 뻔해 보였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정권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외쳤지만, 만만한 게 기업이라고 ‘목소리 큰 다수’와 부딪히면 언제나 양보는 기업 몫이었다. 그나마 윤석열 정부 들어 기업 친화 정책이 여럿 나왔지만, 법인세와 노동법 같은 큰 물줄기는 바뀐 게 없다.

그렇게 삼성 SK 현대자동차 LG 등 우리 기업들은 해외 라이벌보다 높은 법인세율에, 빡빡한 노동법에, 촘촘한 규제에 시달리며 싸워야 했다. 그사이 산학연정(産學硏政)이 똘똘 뭉친 미국은 저만치 앞서갔고,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기업들은 무럭무럭 자랐다.ASPI 보고서는 그 결과물이다. AI, 항공우주, 유전공학, 양자컴퓨터 등 64개 분야의 1·2위는 죄다 중국 아니면 미국이다. 한국이 세계 최강인 줄 알았던 슈퍼 콘덴서, 고급 무선주파수 통신, 고성능 컴퓨터에서도 한참 밀렸다.

미국과 중국이 뛸 때 우리는 쉰 탓이다. AI가 그랬다. 구글 애플 아마존 등 미국 빅테크들은 2015년부터 잇따른 인수합병(M&A)으로 ‘AI 블루칩’을 싹쓸이했고, 중국은 같은 해 ‘중국제조 2025’를 시작하며 첨단산업에 돈과 사람을 대거 투입했다. 바로 그 시기에 삼성은 국정농단 수사에 휘말렸다. 최종 결정권자가 없으니, 대형 M&A와 신사업 투자는 올스톱됐다. 그 ‘잃어버린 10년’ 탓에 삼성은 얼마 전 ‘챔피언 벨트’ 2개(반도체 매출 1위·스마트폰 출하량 1위)를 인텔과 애플에 내줬다.

전문가들은 미·중과의 첨단기술 격차를 다시 좁힐 수 있는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 기업들이 AI와 로봇, 바이오가 만드는 새로운 세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모두가 도와야 할 때다. 여야의 이번 총선 공약이 ‘기업 기(氣) 살리기’가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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