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형 랩·신탁 영업관행 칼 빼든 금감원…"CEO가 책임 져야" 경고

금융감독원이 랩어카운트와 신탁을 통한 증권사들의 채권 ‘돌려막기’ 관행에 대해 강경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각 사 최고경영자(CEO)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도 시사했다.

5일 금융감독원은 서울 여의도동 금융투자협회 대회의실에서 ‘증권사 영업관행 개선을 위한 증권업계 CEO 간담회’를 열고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영업관행은 용인하지 않겠다”고 증권사들에게 경고했다. 이날 간담회엔 함용일 금감원 자본시장·회계 부원장, 서유석 금융투자협회 회장을 비롯해 국내외 증권사 27곳 CEO, 독립리서치업체 두 곳 CEO 등이 참석했다. 금감원은 지난 5월부터 증권업계의 랩·신탁 상품 불건전 영업관행을 점검하고 있다. 이날 함 원장은 “일부 증권사는 고객의 랩·신탁 자산을 운용하면서 특정 투자자의 이익을 해하면서까지 다른 투자자의 손실을 보전했다”며 “감독당국은 랩·신탁 불건전 영업관행에 대해 엄정히 대처할 것”이라고 했다.

금관원은 일부 증권사들의 ‘만기 불일치 운용’ 관행을 집중 검사하고 있다. 높은 수익률을 낼 목적으로 단기 랩어카운트·신탁 계좌에 유동성이 낮은 고금리 장기 채권이나 기업어음(CP)을 편입하는 방식이다.

문제가 불거진 것은 작년 말 금리 급등기에 증권사들이 보유한 채권형 랩어카운트·신탁에서 많게는 수조원가량 평가손실이 발생한 게 계기다. 상품을 사실상 원금보장형처럼 판매한 탓에 투자자에게 손실 상태로 투자금을 돌려줄 수 없다고 판단한 증권사들은 만기가 도래한 채권을 매도하는 대신 신규 고객 자금을 기존 고객에게 지급하는 식으로 사실상 투자금 ‘돌려막기’를 했다. 다른 증권사에 채권을 잠시 맡겨두는 ‘파킹 거래’, 타사에 개설한 자사 명의 신탁 계좌를 통해 가치가 폭락한 채권을 장부가로 사들이는 간접 자전거래 사례 등도 나왔다. 이에 대해 증권사들은 ‘불법이 아니라 단순 관행’이라고 주장해왔다. 이같은 관행으로 일시적으로 높아진 시장 변동성을 피하면 투자자들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도 희박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금감원은 이날 “더이상 위법행위를 실무자의 일탈이나 불가피한 영업관행 탓으로 돌리지 말라”며 강경 입장을 밝혔다.

불건전 영업관행에 대해 CEO에게 직접 책임을 지우겠다고도 시사했다. 함 부원장은 “랩·신탁 관련 불건전 영업관행은 CEO의 관심과 책임의 영역이라고 분명히 말씀드린다”며 “컴플라이언스, 리스크 관리, 감사부서 등 어느 곳도 위법행위를 거르지 못했다면 이는 전사적 내부통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심각한 문제”라며 “내부통제의 최종 책임자인 최고 경영진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함 원장은 “국내 증권업계는 여전히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 단기성과에 집착하거나 랩·신탁처럼 관계지향형 영업을 지속하고 있다”며 “이는 증권업의 창의성, 혁신성과는 거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증권사들은 실효성 있는 내부 통제 체계를 구축하고, ‘자본시장에서의 자금중개 및 공급’이라는 증권사 본연의 기능을 강화하는 데에 역량을 집중해달라”고 했다.

이날 함 부원장은 “최근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로 부상한 ‘이권 카르텔’에 금융이 직간접적으로 개입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유념해 달라”고도 강조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카르텔과의 전쟁’을 선언한 가운데 나온 발언이다. 금감원은 최근들어 부쩍 금융 이권 카르텔을 경계하자는 기조를 강화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 3일 신임 차관들에게 “우리 정부는 반(反) 카르텔 정부이니 이권 카르텔과 가차 없이 싸워달라”고 주문했다. 전날엔 이복현 금감원장이 주재한 금감원 ‘2023년 반부패·청렴 워크숍’을 열고 직원 등에게 “이권 카르텔이 문제인 만큼 복무 자세를 가다듬어 원칙에 따라 감독·검사 업무를 수행하라”고 말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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