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마치 마치 오늘의 날씨처럼" 뮤지컬 <레드북>

[arte] 최여정의 '내 마음을 흔든 그 대사' (2)
뮤지컬 <레드북> 2023. 3.14~5.28

‘사랑은 마치 마치 오늘의 날씨처럼, 흐렸다 환해지고 추웠다 따뜻해져’ 왜 여자가 일을 하려고 그래, 남자가 없어? 아니요, 돈이 없어요. 그러면 몸 쓰는 건 잘해? 그럼요, 무거운 것도 잘 들어요! 아니 아니 아니, 그런 거 말고, 남자한테 쓰는 거.

아내, 딸, 며느리 가릴 것 없이 집안의 여자들에게 호통치는 게 일상인 ‘대발이 아버지’가 등장했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시청률이 무려 65%를 찍던 시대를 살았고, 고조부 제사까지 챙기자니 매달 한 번씩 돌아오는 제사상을 준비하던 엄마랑 참하게 동그랑땡을 빚다보니, 나는 어느새 전형적인 ‘K-맏딸’이자 ‘유교걸’이 되어 있었다.

세상이 바뀌어서 대선후보들의 토론에서도 ‘페미니즘’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가 여성 유권자들의 마음을 가져가는 기준이 된양 싶지만,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뼛속 깊은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는 쉽사리 사라질리 없었다. 세상천지 이 같은 나라는 없을 것이며, 저 바다 건너 유럽 같은 선진국의 여성들은 남성들과 어깨를 견주고 마음껏 자유롭게 살아갈 것이라며 동경했지만, 실상은 다를바 없다니. 뮤지컬 <레드북>의 시작을 여는 무대에서 안나와 빵집 주인이 나누는 저 대화는 앞으로 이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뮤지컬의 배경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 빅토리아 여왕이 대영제국을 통치하던 시대였지만, 여성의 지위는 조선시대 만큼이나 열악하기 짝이 없었던 아이러니.

그 시대의 여성은 남성들이 원하는 ‘집 안의 천사’가 되어야 했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정숙한 아내, 현명한 어머니를 상징하는 말로 ‘집 안의 천사’가 사용된다. 우리나라로 치면 ‘현모양처’쯤 되려나.

영국 시인 코벤트리 패트모어가 1854년에 쓴 서사시 ‘집 안의 천사’는 남성이 바라보는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이자, 가정을 가꾸고 자신을 희생하는 이상적인 여성을 숭고하게 부르는 이름이지만, ‘자기만의 방’을 갖자던 버지니아 울프는 <집안의 천사 죽이기>라는 책을 내며 이를 거부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은 유산을 받을 수 없었고, 자신의 신체를 언급조차 할 수 없었던 이 때, 슬플 때마다 야한상상을 하고 ‘나는 야한 여자야!’라고 당당히 외치는 안나는 당당히 실명으로 19금 소설을 출간한다. 쉬쉬하면서도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지만, 출판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고소까지 당하게 되면서도 안나는 결코 자신이 ‘미쳐서’ 한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린다.
그래서 <레드북>은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서도 한국 창작뮤지컬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기에 충분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던지는 주제의식적인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여신님의 보고 계셔>의 콤비 한정석 작사가와 이선영 작곡가가 다시 한번 합을 맞춰 4년만에 공연을 완성하여 2017년 트라이아웃 이후 어느새 세 번째 공연이니, 좋은 무대는 반드시 사랑받기 마련이다.

특히 뮤지컬 <레드북>의 미덕은 음악이다. 뮤지컬은 결국, 음악이 성패를 가른다라는 공식을 이 작품은 그대로 입증한다. ‘사랑은 마치’‘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등 세련되고 안정적인 멜로디의 곡들은 유튜부 조회수 200만 회를 넘길 정도로 사랑을 받고, 공연과는 별도로 뮤지컬 넘버 감상회까지 만들 정도다. 공연장을 나서면서 나도 모르게 절로 흥얼거리게 되니, 뮤지컬 레드북에 제대로 후크 당했다.

‘사랑은 마치 마치 오늘의 날씨처럼, 흐렸다 환해지고 추웠다 따뜻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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