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산업부의 오래된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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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호 경제부 차장정부세종청사 산업통상자원부 3층 무역정책과에는 오래된 거울이 하나 걸려 있다. 밤색 나무틀의 이 반신 거울에는 ‘수출은 국력의 총화’라는 표어와 함께 물감으로 채색된 ‘1970년 수출 10억달러 돌파’ 그래프가 새겨져 있다. 1970년에 제작된 거울이니 연배만 놓고 보면 산업부 국장급과 맞먹는다.
지난 50년 동안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서 정부과천청사를 거쳐 세종시까지 내려오면서도 귀퉁이 하나 크게 깨진 데 없는 걸 보면 산업부 직원들이 애지중지 다뤘던 게 분명하다. 수출강국 도약이라는 국가적 염원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상징물이다.
또 한 번 위기 버팀목 된 수출
이 거울이 처음 벽에 걸린 1970년 못지않게 2021년 올해도 우리 수출 역사에 의미가 큰 한 해였다. 최단기 무역규모 1조달러 달성(299일), 역대 최대 연간 수출액 기록(6049억달러 이상·전망치 기준), 사상 최초 월 수출액 600억달러 돌파(11월) 등 굵직굵직한 신기록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올해 실적이 더 값진 건 코로나19 위기를 뚫고 얻어낸 쾌거여서다. 내수 침체로 연 4% 성장이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수출이 국가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역시 믿을 건 수출뿐”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돌이켜 보면 1970년대 1·2차 오일쇼크는 물론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성장을 지탱하고 경기 회복을 이끈 건 언제나 수출이었다. 한국과 같은 수출 질주는 전 세계적으로 전례를 찾기 힘들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무역 1조달러 클럽’에 새로 가입한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한국수출호 앞에선 통상적인 경제이론도 무력화된다. 약(弱)달러든, 강(强)달러든 가리지 않는다. 연평균 원·달러 환율이 1053원까지 떨어진 2014년에도 수출은 전년 대비 130억달러 늘었다.이런 이유로 한국 수출 성적표에는 언제나 ‘왜’라는 질문이 뒤따른다. 답은 수출 품목·수출 지역 다변화다. 반도체가 무너지면 석유 제품이 떠받치고, 석유 제품 호황 사이클이 끝날 때쯤 선박·철강·자동차가 이어받는 선순환 구조가 작동한다. 2004년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시작된 동시다발적 FTA 추진은 무관세 수출 영토를 넓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자유무역 척화비 뿌리 뽑아야
산업부 거울 속 구호처럼 ‘수출은 국력의 총화’라지만 누가 뭐래도 지난 반세기 수출 역사의 주인공은 세계를 누빈 기업들이다. 몇 장 안 되는 카탈로그로 1976년 포니 다섯 대를 에콰도르에 처음 수출한 현대자동차, 제품 사진 한 장으로 1977년 275대의 컬러TV를 파나마에 내다 판 삼성전자의 전설 같은 실화는 우리 산업계 전체에 ‘뚝심 DNA’를 심는 밑거름이 됐다.올 한 해 이어진 글로벌 공급망 차질 사태에서 보듯 지금 한국수출호는 새로운 산업·무역질서 재편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휘말려 있다. 우물쭈물하다 큰 물줄기를 놓치면 주류에서 벗어나 무역 변방국으로 뒤처질 수밖에 없다.이런 와중에 일본 호주 캐나다 등 11개국이 참여하고 있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위한 정부 내 논의가 지지부진하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 원인이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농산물 개방에 따른 표심 이탈을 우려하는 정치권의 반대라고 한다. 시대착오적인 현대판 척화비와 다름없다.
냉혹한 국제사회에서 후회할 여유는 없다. 3개월 앞 대선판 결과에 눈이 먼 정치권의 당리당략에 한국수출호가 길을 잃는 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