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바뀌고 시신 사라져…5·18 무명열사의 기막힌 사연

41년 동안 이름 없는 시신으로 묻혀있던 고(故) 신동남 씨의 사연은 80년 5월 혼란했던 광주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름이 잘못 적힌 병원 기록과 시신을 착각한 다른 피해자 가족의 실수,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 않은 행정기관이 빚은 비극적인 개인사였다. ◇ 이름 잘못 적은 병원 기록…비극의 시작
신씨는 5·18 항쟁 기간 첫 발포가 이뤄진 5월 20일 광주역 인근에서 총상을 입고 적십자병원으로 실려 온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신씨는 복부에 총을 맞아 내장이 쏟아질 정도의 심각한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생명이 오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수술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병원 측은 그의 이름을 '신동남'이 아닌 '심복(봉)남'으로 잘못 기록했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신씨가 겨우 입을 열어 하는 말을 병원 측 관계자가 들리는 대로 적어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소한 실수였지만, 추후 신씨의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웠던 비극의 시작이었다. 병원에선 신씨의 이름과 함께 가족의 전화번호를 확보해 연락을 취했다.

연락을 받고 급히 병원으로 찾아온 고종사촌은 신씨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던 고종사촌도 그 길로 시위대에 합류했다. 그사이 수술을 받았던 신씨는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다음 날 숨을 거뒀다.

병원에 찾아온 고종사촌은 영안실에 다른 시신과 함께 안치된 신씨의 모습을 확인하고 관을 구하러 나갔다.

그것이 신씨의 시신이 확인된 마지막 모습이었다.

고종사촌은 22일 관을 구해 병원으로 돌아왔지만, 시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시신을 전남도청으로 옮겨갔다는 것이었다.

당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군경에 의한 피해 상황을 종합하고, 사망자를 축소하려는 신군부의 '시신 빼돌리기'를 막기 위해 각 병원에 흩어져 있던 시신을 전남도청으로 모았다.

가족들이 피해자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한 배려이기도 했지만, 신씨와 가족들에겐 날벼락 같은 일이기도 했다.

◇ 장례 치른 아들이 살아있다?…매장한 시신은 누구
이런 식으로 시신을 모아놓은 전남도청 앞에선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혹여나 연락이 두절된 가족을 찾으러 온 부모와 아내, 자녀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시신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있는 가족의 모습을 확인한 이들은 쓰러지듯 시신을 붙잡고 비통한 울음을 터트렸다.

이금영 씨의 어머니도 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전남도청에 나와 시신을 살펴보던 어머니는 연락이 두절된 아들과 꼭 닮은 시신을 봤다.

이마에 있는 상처까지 확인한 이씨의 어머니는 틀림없이 이 시신이 자기 아들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 시신은 사실 이씨가 아닌 적십자병원에서 옮겨진 신씨의 시신이었다.
이를 알지 못했던 이씨의 어머니는 신씨의 시신으로 장례를 치르고 29일 망월묘역(구묘역)에 안장했다.

그 시각 이씨는 20일 계엄군에 체포돼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상태였다.

운전을 하지 못했던 이씨였지만 트럭으로 계엄군을 치어 죽였다는 누명을 쓴 상황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증인을 신청했다.

그러면서 이씨의 생존 사실이 알려졌다.

죽은 줄 알았던 이씨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확인됐지만, 이씨인 줄 알고 망월묘역에 안치된 시신은 정작 누구의 시신인지 알지 못하게 됐다.

그렇게 신씨는 이름을 잃어버린 채 41년간 5·18 묘역에 안장됐다.

유가족은 1993년 "신씨의 시신이 병원에서 사라졌다"며 행방불명자로 신청했지만,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인정되지 않았다. 유가족은 "신청을 했는데 관련성이 없다면서 인정해주지 않으니 포기해버렸다"며 "저희는 힘이 없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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