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디지털 시대의 이름

최양희 < 서울대 AI위원회 위원장 yhchoi@snu.ac.kr >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이 있다.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엄중하니 조심히 살아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름을 남긴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나마 많은 경우 스캔들이나 범죄에 연루된 오명에 불과하다.

날이 갈수록 존경받는 이름을 남기기 어려워진다. 한 사람의 삶 전체가 디지털 세계에 기록되고 아주 쉽게 분석되곤 한다. 죽은 자가 남긴 말, 글, 사진은 물론 언제 어디를 갔고, 무엇을 했고,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소비를 했는지도 거의 완벽히 기록되는 것이 현대의 디지털 세상이다.이 빅데이터는 티끌 같은 허물을 찾고자 하는 수많은 누리꾼에 의해 파헤쳐진다. 그리고 하나라도 발견되면 그 사람이 평생 어떤 가치를 추구했고, 어떤 모범을 보였고, 무슨 업적을 남겼는지는 일순간 매도된다. 때때로 티끌이 의도적으로 조작되기도 한다. 뉴스, 영상, 녹음도 이제는 믿기 어렵다. 피해를 봐도 죽은 자는 항의나 변명을 못 하고 그냥 “내 이름이 이렇게 기억돼서야”라고 탄식하지 않을까.

사회가 복잡해지는 만큼 하나의 이름으로 한 사람 평생의 모든 삶을 대표시키는 것이 이제 불합리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미 오래전부터 전문 분야에서는 여러 이름을 쓰는 것이 널리 통용돼 왔다. 예술가들이 예명을 쓰고, 작가가 필명을 쓰듯이 전문 분야에서의 삶을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일반인 사이에서도 부쩍 확산하고 있다. 일부 혁신적인 회사는 회사 내에서 쓰는 이름을 따로 짓고 존칭 없이 서로 부르게 하고 있다고 한다.

많은 이에게 이미 이름은 여럿 있다. 직장에서 부르는 이름, 집에서 부르는 이름, 취미 동아리에서 부르는 이름, 소셜미디어마다 달리 부르는 애칭 등등. 이런 경우 같은 사람이라도 쓰는 이름마다 평가가 다를 수 있다. 예를 들면 가정에서는 폭군 같은 아버지인 홍 아무개가 직장에서는 최고의 능력자인 스티브 홍인 경우 각각의 이름은 다른 이미지를 연상시킬 것이리라.이름은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물, 조직, 추상적 개념뿐만 아니라 이제는 정보자료도 이름을 갖는다. 책도 제목이 있고, 악보도 ‘사계’ ‘작품번호 414’와 같이 식별용 이름이 있다. 나아가서 컴퓨터에 저장되는 모든 자료는 파일명이 있다. 기억하기 어려운 이름을 쉬운 이름으로 변환하거나 어떤 이름이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파악해 주는 서비스는 디지털 세상에 꼭 필요한 핵심 서비스다.

이름을 짓고, 관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름 서비스가 어떤 정보까지 알려주는가는 매우 민감하고 중요하다. 이름을 입력하면 이 사람의 다른 이름들까지 나오는 것은 괜찮다고 해도, 사생활 정보도 같이 나오거나 일생의 기록이 같이 검색되지는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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