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스마트] '창궐과 착취'의 디스토피아…저울대 오른 사생활의 가치

인류의 음울한 미래를 다룬 창작물의 세계관은 대개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디스토피아'로 구분된다
전쟁·재난 등으로 기존 체제가 붕괴한 무정부 상태를 다루는 전자의 작품에는 영화 '매드맥스' 등이 있다.

후자는 정반대로 발달한 기술로 권력이 개인을 고도로 통제하는 사회를 그린다. 최근 화제가 된 디스토피아 창작물은 1988년작 일본 애니메이션 '아키라'다.

2020년 도쿄(東京) 올림픽 불발을 맞추면서 예언서 대접을 받고 있다.

아키라가 상상한 2020년 지금의 실제 세계 역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창궐로 디스토피아적 현실에 가까워 보인다. 인류 문명의 정점으로 여겨졌던 현대의 도시가 알고 보니 새로운 전염병의 출현에 전혀 방비가 돼 있지 않았고, 각국 정부는 사상 초유의 국경 폐쇄와 외출 통제 조치를 내렸다.

사생활의 가치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서구권에서는 이유를 막론하고 개인의 기본권이 제한받는 상황을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이다.

'어벤져스' 시리즈에 출연한 캐나다 배우 에반젤린 릴리는 최근 인스타그램에 "단지 호흡기 감기일 뿐인데 마치 계엄령을 내린 것처럼 느껴진다"며 정부의 자가 격리 방침에 반대했다. 그는 며칠 지나지 않아 이런 발언을 주워 담고 사과했다.

영국·독일·이탈리아 등은 확진자 동선 추적을 위해 스마트폰 사용 자료를 실시간으로 수집·공유하기로 했다.

한시적 조치라고는 하지만, 우려는 그치지 않는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우리는 개인의 프라이버시 영역을 모두 없애는 전례 없이 막강한 감시체제의 등장을 목도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등을 통해 전염병의 공포를 경험하고 강력한 장치를 마련해놓은 한국과 달리, 서구사회는 이런 사태에 준비된 사회적 합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국에서는 뜻밖의 계기에서 사생활 보호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불법 성 착취 영상물 공유, 이른바 'n번방' 사건의 극악무도한 범죄 행각이 드러나면서 피의자들은 물론 처벌 근거가 뚜렷하지 않은 참여자들도 신상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불똥은 이들이 이용한 메신저 텔레그램으로까지 번져가고 있다.

익명성에 숨어 온갖 범죄가 배양되는 온상으로 지목되며 '텔렉시트(텔레그램+엑시트)'란 말까지 나돈다.

2014년 카카오톡 감청 논란이 불거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사생활을 지켜줄 '방주'로 텔레그램을 선택했던 것에 비춰보면 그야말로 역설적인 상황이다.

사실 공동체의 위기 앞에 개인의 권리를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느냐의 문제는 오랜 논쟁거리다. 다만, 전염병 대창궐과 미성년자 성 착취라는 지독히 음울한 현실을 맞닥뜨린 2020년은 어떤 방향이든 이 문제의 역사적 분기점으로 남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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