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쉬쉬하고 덮어주고…갈길 먼 '性스러운 캠퍼스'

학생들의 성 문제 상담 업무를 맡고 있는 고려대 양성평등센터. / 한경 DB
[ 김봉구 기자 ] 고려대에서 학생자치단체 대표가 성폭행 사건에 연루돼 사퇴한 사실이 19일 알려졌다. 지난 1월 학내 동아리방에서 성폭행을 시도했다가 미수에 그쳤고, 피해자가 이를 뒤늦게 알리면서 가해자는 단체에서 제명됐다는 게 골자다.

캠퍼스가 성추문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한 두 대학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며칠 간격으로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서울대 개교 이래 처음으로 현직 교수가 법정 구속된 사례를 보자. 바로 어제 재판(3차 공판)이 열렸다. 물의를 빚은 강석진 교수는 유명 수학자다. 작년 국내에서 열린 세계수학자대회 준비 과정에서 인턴 여대생을 성추행해 문제가 불거졌다. 사태는 커졌다. 서울대 내에서도 강 교수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제보가 잇따랐다.

이름이 알려진 학자가 그랬다는 사실도 충격이지만 더 큰 문제는 사후 대처였다. 서울대는 강 교수의 사표를 수리하려다 반발에 부딪쳤다. 피해자가 속속 나타나는데 정작 학교 당국은 징계할 생각이 없었던 셈.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법원에 강 교수를 옹호하는 제자와 동료의 탄원서가 다수 제출됐다. ‘인간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란 안이한 평가가 담겼을 것이다.

취재 과정에서 겪은 캠퍼스의 성추문에 대한 인식 수준은 매우 낮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이틀 전인 17일엔 박희태 전 국회의장의 건국대 석좌교수 재임용 사실이 알려지면서 문제가 됐다. 딱 여대생 나이의 캐디 성추행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그다. 학교 안팎이 떠들썩해지자 그제야 교수직에서 물러나는 민망한 상황을 연출했다.

재임용 철회를 전하면서 건국대가 밝힌 입장은 이랬다. “기존 석좌교수 예우 차원에서 진행한 재위촉이 불필요한 논란을 일으켜 매우 안타깝다.” 성추행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은 인사를 임용한 게 ‘잘못’이란 인식은 별로 읽히지 않는다. 물론 항소심이 진행 중인 사안이다. 하지만 학교 측 변(辯)대로 석좌교수가 명예직이라면 오히려 더 재고했어야 할 일 아닐까.

시곗바늘을 좀 더 돌려보면 서강대 오리엔테이션(OT)에서의 성희롱 논란이 있었다. 재학생 선배가 신입생 후배들을 맞는 OT에서 ‘아이러브 유방’, ‘작아도 만져방’ 같은 낯 뜨거운 표현을 쓴 사실이 10일 SNS(소셜네크워크서비스)를 달궜다. 마침 이 대학 석좌교수인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이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 논란에 기자회견을 연 날이었다.최근 10여일 동안 일어난 캠퍼스 성추문 사건만 꼽은 게 이 정도다.

새삼 ‘상아탑’을 들먹이며 개탄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사실 캠퍼스에 특별히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바라는 게 아니다. 요는 성적 범죄에 관한 대학의 인식과 대처 수준이 상식선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많은 대학들이 성추문을 쉬쉬하거나 덮으려고 한다. 정식으로 문제 제기해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경우도 다반사다.심지어 관련 취재 도중 “가십성으로 보도할 거면 취재하지 말라”는 대학 교수도 만났다. 각종 성적 범죄에 관한 캠퍼스의 인식이 상식적 수준에 미달하는 이유 중 하나다. 내부 처리 원칙 하에 그들끼리 합의하고 넘어가는 케이스가 많은 것이다.

딴에는 구성원들 손으로 근본적 대책을 내놓겠다는 얘기로 들린다. 그렇다고 하면 날이 갈수록 더 빈번히 성추문에 휩싸이는 캠퍼스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핵심은 인식 변화다. 교수와 제자의 권력관계, 대학생 선후배 위계구조가 안이한 끼리끼리 문화,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폐쇄적 성 담론과 만났을 때 문제가 생긴다. 대학 내부의 금기사항이 늘어난다고 해서 해결될 사안은 아니다. 근본적 인식이 바뀌어야 하고, ‘그들만의 리그’를 바꾸는 게 인식 전환의 지름길이다. ‘지성의 전당’을 향한 대학의 갈 길이 멀다.

한경닷컴 김봉구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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