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그리스 구제금융 한시 연장…'묘수'인가 '악수'인가

미봉책으로 국가부도 일단 모면
유로 한계 미해결…위험요인 상존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설 연휴 기간 그리스 구제금융 연장 여부를 놓고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이 타협점을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프랑스 등 일부 회원국 사이에 그리스 긴축이행 완화에 대한 우호적인 기류가 형성된 데다 ‘유로존 붕괴’라는 최악의 상황만은 피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4개월 연장’이라는 미봉책으로 한숨을 돌렸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진행될 협상의 핵심은 ‘과연 그리스가 얼마나 긴축을 이행하느냐’ 하는 문제다. 이 논쟁의 뿌리는 유로존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한계에 닿아 있다.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은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정책 운용의 조화가 유럽 경제와 유로화 가치 안정을 위해 매우 중요하지만 처음 탄생할 때부터 이 부분이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유로존은 단일 통화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나 현실적인 제약 등으로 단일 재정정책을 수행하는 재정 통합은 이루지 못했다. 이 때문에 차선책으로 ‘안정 및 성장협약(SGP·stability and growth pact)’ 중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3%, 정부부채는 GDP의 60% 이내로 회원국이 지키도록 함으로써 재정여건의 동질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해 왔다.

하지만 유로본드(유로존 공동 발행 국채) 등을 통해 회원국 간 재정의 동질성을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유로존은 ‘개별 사정을 감안한 회원국별 독립적 재정정책’으로 지금까지 운영됐다. 유럽중앙은행(ECB)의 통화정책도 독일과 같은 경제 핵심국의 여건이나 철학을 반영해 추진됐기 때문에 그리스 같은 경제 취약국의 여건에 맞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특히 SGP는 재정 통합이 어려운 유로존 입장에서 반드시 준수해야 할 핵심 사안임에도 이를 위반한 회원국에 대한 제재 수위는 미온적인 조치에 그쳤다. 4년 전 유럽 재정위기가 발생하기 이전까지 재정규율을 위반한 회원국에 대해 보고서 작성만으로 제재가 종결돼 위반에 따른 강제력이나 이행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유로존이 위반국에 대해 강력히 제재하지 못했던 것은 제재를 결의하는 주체는 각국 재무장관인데, 자신들도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인식에 따라 위반국을 강하게 제재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회원국 확대 실익 논쟁에서 ‘하나의 유럽’을 만든다는 정치적 고려로 경제 체질이 허약한 국가를 유로존에 가입시킨 것도 또 다른 요인이다.

재정 관련 SGP가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 경제 취약국은 ECB의 통화정책을 주어진 외생조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유로존 출범 이후 통화정책이 경제 핵심국 중심으로 운영돼 경제 취약국에는 거시 경제적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으며, 그 부담이 재정으로 전가돼 국가 채무가 급증하고 재정위기가 발생했다.단적인 예로 그리스와 같은 경제 취약국은 자국 경제여건을 고려할 때 확장적인 정책 수행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ECB가 긴축 통화정책을 고수할 경우 불가피하게 팽창적인 재정정책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통화정책의 주권을 갖고 있다면 금리인하 등을 통해 재정정책과 부담을 공유할 수 있으나 유로존에서 이런 정책 조합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유로화 도입으로 성공했다고 평가받아 왔던 유럽통화동맹(EMU)도 환율변동이 갖는 조기경보 기능이 상실돼 회원국 간 불균형이 심화되는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경제 취약국은 실질환율이 고평가돼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되지만 경제 핵심국은 실질환율이 저평가돼 해가 지날수록 경상수지 흑자가 쌓이는 불균형이 심화돼 왔다.

이 때문에 1992년 유럽통화위기 때 영국, 이탈리아의 탈퇴로 사실상 EMU의 전 단계인 유럽환율조정체계(ERM)가 사실상 무력화됐던 사례가 유로존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는 극단적인 회의론까지 나왔다. 당시 ERM은 참가국 간 환율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환율 변동을 유럽통화단위(ECU) 중심 환율의 상하 2.25% 이내로 제한했다. 경제 취약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환율 정책 확보를 위해 유로존에서 탈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던 배경이다.현재 그리스 사태와 관련해 유로존이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이 나오고 있으나 시장의 신뢰를 얻기에는 부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일부에서 거론하고 있는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방안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경제 취약국의 연쇄 탈퇴로 이어져 유로존이 붕괴될 우려가 높기 때문에 허용하기 어렵다.

유로존은 그렉시트라는 최악의 국면은 면했다. 하지만 유로존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한계가 해결되지 않는 한 앞으로 진행될 협상에서 언제든지 재정위기 위험과 이에 따른 경제 취약국의 문제는 발생할 소지가 크다. ‘그리스 구제금융 4개월 연장’이 ‘묘수’가 될지 ‘악수’가 될지는 그때 가서 판가름 날 것으로 예상된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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