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막바지 더위 못참고 삭발…"조폭이야, 스님이야?"

직장인들 힘겨운 여름 나기

민소매에 짧은 치마 입었더니 "남자 시선 즐기냐" 女선배 태클

에너지 절약에 냉방온도 제한
8명이 선풍기 3대 놓고 쟁탈전…내 돈 내고 1대 더 사야하나
일러스트=이정희 기자 jh9947@hankyung.com
서울 강남의 한 제조업체에 근무하는 최 대리의 여름철 출근 복장은 반바지다.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는 최 대리에게 요즘 같은 더운 날씨의 출근길은 지옥이나 마찬가지다. 냉방을 한 지하철 안에서도 땀을 뻘뻘 흘리기 일쑤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회사로 걸어가면 사무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와이셔츠와 양복이 흠뻑 젖어 버린다. 고민 끝에 그는 아이디어를 냈다. 반바지와 면티 차림으로 출근했다가 회사에서 양복으로 갈아입는 방법이다. 출근 시간은 오전 7시 전.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다. 그는 출근 직후 회사 지하 샤워장으로 직행해 몸을 씻은 후 사무실로 들어간다. “부장님에게 부지런하게 일찍 출근한다는 칭찬도 듣고, 사무실에선 새 옷으로 갈아입으니 상쾌하고…. 일석이조죠.”

김 과장 이 대리들의 더위와의 싸움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33도 이상의 폭염은 사실상 끝났지만 낮에는 당분간 30도를 넘는 무더위가 계속될 전망이다. 올여름도 어김없이 에너지 절약을 위해 공공기관뿐 아니라 민간 기업에서도 냉방 온도를 제한하는 곳이 많다. 이렇다 보니 사무실 내 온도가 바깥보다 오히려 더 높은 경우가 적지 않다. ‘더위와의 싸움’을 벌이는 직장인들의 에피소드를 들어봤다.여벌 와이셔츠는 필수

제지회사 영업직에 근무하는 황 대리는 영업사원 드레스코드에 맞춰 1년 365일 긴팔 와이셔츠에 정장을 챙겨 입는다. 입사 초 키 175㎝에 몸무게 63㎏일 때만해도 이런 복장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여름에도 깔끔해 보이고, 몸 맵시도 난다는 소리에 더운 줄 몰랐다.

그러나 살이 찌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는 여름만 되면 회사에 여벌 와이셔츠를 서너 장 가져다 놓는다. 땀 때문이다. 수년간 영업으로 다져진 살 덕분에 요즘은 5월부터 비지땀을 흘리기 시작한다. 예전보다 거래처와 술자리가 줄긴 했다. 그래도 제지업계에선 아직 등심과 소주를 곁들인 식사 자리가 많다. “예전엔 추위를 많이 탔는데 이제는 더위를 타는 체질로 바뀌었어요. 가뜩이나 이동도 많은데 요새는 회사에 여벌 와이셔츠를 몇 장씩 두고 중간중간 회사에 들어가 갈아입고 있습니다.”더위에 삭발해 버린 ‘조폭’ 과장

중견 정보기술(IT) 회사인 A사는 지난해부터 완전 복장 자율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더운 여름철에는 여직원은 짧고 얇게, 남직원도 반바지를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닌다. 슬리퍼 착용도 다반사다. 그럼에도 이 회사에 근무하는 김 과장은 폭염을 이기지 못하고 얼마 전 삭발을 했다. 유난히 더위를 타 땀을 많이 흘리는 탓에 순수한 의도로 머리를 모두 밀어버린 것.

문제는 머리를 밀면서 그의 외모가 너무 튀게(?) 된 점이다. 김 과장은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해서 팔과 가슴 근육이 발달하고 체구가 크다. 거기에 삭발까지 했으니 마치 외모가 ‘조폭’처럼 돼 버린 것이다. 사내에서 후배들은 그를 무섭다고 피하고 있다. 여직원들은 무섭다고 피하고, 팀장은 ‘네가 중이냐’며 면박을 주고 있다.그래도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딱 하나 좋은 게 막힌 길에서도 인상만 한 번 찌푸려 주면 길이 마치 ‘홍해’처럼 갈라진다”는 게 그의 얘기다.

푹푹 찌는 날씨에 팍팍한 사내 분위기

서울 광화문에 있는 금융회사에서 근무하는 박 대리는 사내에서 손꼽히는 패셔니스타다. 박 대리가 입사했을 당시만 해도 쿨비즈가 유행이었다. 무더운 날씨에 정장이 업무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냉방비만 더 들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박 대리에게는 마음껏 ‘패션쇼’를 벌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여름철엔 최근 일본에서 유행하는 치마부터, 연예인들이 착용하는 머리띠까지 뽐낼 수 있는 모든 의상과 액세서리를 활용했다. 동료들의 관심과 시선도 은 근히 즐겼다.그런데 올 들어 회사가 인력 감축 등 구조조정에 착수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경영 상황이 나빠지고 수익성 제고를 위한 전사적인 대책이 강구되면서 회사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한 것. 쿨비즈 지침도 철회됐다. 남성들은 양복 정장을 다시 입기 시작했고, 여성들도 단정한 정장으로 복귀했다. “정장이 더 덥잖아요. 사내 분위기도 살벌한데, 옷 색깔도 칙칙해지니 요즘 분위기가 여러모로 말이 아닙니다.”

금융업계에 근무하는 정 대리는 여름만 되면 옷 입는 게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회사에선 업무 효율성과 냉방비 절감을 위해 쿨비즈 복장을 권유하고 있지만 사내에선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마음 같아서는 시원한 민소매 상의에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고 싶지만 팀 내 군기반장인 박 과장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치마 길이가 조금만 짧아져도 유부녀 선배인 박 과장의 태클이 들어온다. “정 대리, 오늘 참 시원하게 입고 왔네. 남자들 눈길 받는 것을 은근히 즐기는 스타일인가봐. 내일은 더 짧게 입고 와. 알았지?” 한 번 심하게 지적을 받고 난 뒤 정 대리는 쿨비즈 패션을 아예 포기하기로 했다. “좀 덥더라도 차라리 정장을 입는 게 마음이 편해요. 이럴 거면 뭐하러 쿨비즈 복장을 권유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소리 없는 선풍기 쟁탈전

경기 파주에 있는 A출판사에서는 여름철만 되면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진다. 바로 ‘선풍기 쟁탈전’이다. 물론 사무실에는 에어컨이 있지만 온도는 늘 26도에 맞춰져 있다. 민간 기업도 공공기관처럼 에너지 절약에 동참해야 한다는 사장님의 특별 지시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최악의 폭염이 계속되면서 에어컨만으로는 버티기 힘들어졌다. 선풍기라도 있어야 그나마 낮시간을 버틸 수 있다. 문제는 선풍기가 사무실에 딱 네 대밖에 없는 것. 한 대는 편집장 전용이고, 8명의 직원에게 할당된 선풍기는 세 대다. 선풍기 방향을 고정시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직원들은 회사 총무팀에 “선풍기를 더 사달라”고 건의도 해봤지만 감감무소식이다. 내 돈 내고 사볼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러기엔 또 아깝다. “출판사 월급이 얼마나 된다고요. 선풍기까지 제 돈 내고 사야 하나요.”

폭염 때문에 되레 감기 걸리기도증권사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신 대리는 자칭 이번 무더위의 최대 피해자다. 팀 내의 유일한 여자인 그는 평소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로 웬만한 더위는 잘 참고 견딘다. 문제는 푹푹 찌는 무더위로 인해 남자 직원들이 에어컨 온도를 하루 종일 20도로 맞춰 놓은 데서 발생했다. 며칠이 지나자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리고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30도가 넘는 바깥 날씨와 20도 안팎인 실내의 온도차로 인해 냉방병에 걸린 것. 긴팔 카디건에 무릎 담요까지 걸치며 필사적으로 방어했지만 그는 지난달 내내 감기를 달고 살았다. 남자 직원들 몰래 에어컨을 꺼봤지만 채 5분도 안돼 “누가 껐냐”며 에어컨은 재가동됐다. “더위로 고생하는 분들에겐 죄송한 이야기지만 저한텐 심각한 문제입니다. 전기료도 아낄 겸 실내 온도를 26도로 맞추면 안될까요.”

강경민/안정락/김은정/강현우/김동현/김인선 기자 kkm1026@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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