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대리·과장들의 '사연있는' 상사 뒷담화

보도자료 초안은 '색칠공부' 노트…토씨까지 빨간펜 '쫙쫙', 이거 넣고 다시!
힘들게 A급 아이돌 섭외했더니…걔네 누군데? 유명해? 아무튼 난 몰라!

"무조건 1등" 특명 어쩌라고…
사장이 제품 개발 직접 챙겼지만 트렌드 너무 앞서가 시장선 외면

볼펜은 '모나미 153'만
다 썼다고 새 것 사면 큰일나…심만 갈고 다시 써야 해요
주의! 이번주 ‘金과장&李대리’는 각 기업 회장님과 사장님들은 읽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냥 우리 ‘부하 직원’끼리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신문을 한 장 넘기시면 알찬 부동산 정보가 가득합니다. ^^

“…홍길동 사장의 사내 별명은 ‘홍 대리’다. 실무자가 미처 생각지 못한 작은 부분까지 챙기는 꼼꼼함과 수시로 매장을 찾아 문제의 해법을 찾는 현장 경영이 그의 성공 비결이다….” 최고경영자(CEO)의 경영 스타일을 묘사하는 기사에 종종 등장하는 구절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 월급쟁이들은 다 알고 있다. ‘CEO가 대리로 불린다는 것’의 행간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지를. 주인의식을 가져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게 직장생활의 진리라지만 꼼꼼한 CEO를 모시고 일해야 하는 김과장 이대리들은 애환이 적지 않다.

○보스는 ‘빨간펜 선생님’

한 중견기업 홍보실에서 일하는 P는 보도자료를 만들 때마다 ‘빨간펜 선생님’인 K부회장의 검열을 견뎌내는 게 성격 괴팍한 몇몇 기자에게 시달리는 일보다 더 힘들다. “보도자료 초안을 들고 가면 토씨 하나하나를 다 보세요. 정말로 손에 빨간펜을 쥐고 쫙쫙 그으시는데, ‘이렇게 바꿔 와’라는 말이 나올 즈음이면 종이는 이미 시뻘겋게 변해 있죠. 흑흑.” 문제는 K부회장이 요구하는 것을 모두 집어넣다 보면 보도자료가 ‘산으로 간다’는 점이다. 소비자가 알고 싶어 하는 정보를 콤팩트하게 담는 게 보도자료의 기본이건만, K부회장은 제품의 가치와 회사 비전을 장황하게 설명하길 바라는 스타일이다. “무슨 보도자료가 이렇게 장황하냐”며 투덜대던 기자들도 자초지종을 듣고 나면 “고생 많아요”라며 조금은 이해해 준다고.

정부 부처의 A장관은 ‘보고서의 달인’으로 유명하다. 인사권자가 그의 일목요연하고 깔끔한 보고 스타일에 반해 장관으로 발탁했다는 얘기가 관가에 나돌 정도다. 브리핑 자료나 연설문의 단어 하나하나부터 마침표, 쉼표 같은 문장부호까지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이다.

국제회의를 앞둔 A장관이 연설문을 고치느라 점심과 저녁을 모두 건너뛰고 마라톤 회의를 한 일화는 이 부처에선 전설로 통한다. A장관은 “내가 완벽주의 성향이 있고 헌신적으로 일하려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직원들은 “장관님 의욕이 넘치는 것은 좋지만 회의가 무한정 길어지다 보니 지치기 일쑤”라고 토로했다. ○CEO의 ‘먹거리 X파일’

식품업계에선 신제품 하나를 내놓으려면 대부분 CEO의 최종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오랜 업력을 토대로 미각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식품회사 CEO들은 요구사항 또한 깐깐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식신(食神)이 아니고서야 시시각각 변하는 소비자들 입맛을 어찌 매번 정확히 맞히랴.

최근 B사의 마케팅 담당자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이유는 CEO가 줄기차게 밀고 있는 신토불이 콘셉트의 상품이 계속 부진한 실적을 내고 있어서다. CEO는 시식회에서 자신이 직접 개발을 지시했던 이 제품에 대해 ‘무한 만족’을 드러내며 “무조건 1등으로 키우라”는 특명을 내렸다. 하지만 현재 식품시장 트렌드에선 “너무 앞서나간 제품”이라는 게 중론이다. 마케팅팀장 J의 하소연. “매주 보고하러 갈 때마다 그 제품 매출 얘기가 나올까봐 조마조마합니다. 똑같은 콘셉트의 후속 제품도 여러 건 출시될 예정인데, 우리 팀 분위기는 완전 초상집이에요. ㅠㅠ.” 패션업체의 광고 담당자 W는 오너의 독특한 ‘팬심(fan心)’ 때문에 골치를 썩이고 있다. 이 회사 회장은 광고 모델을 철저히 본인 취향에 따라 결정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최근 경쟁 업체들이 아이돌을 발탁하는 추세에 맞춰 W는 ‘A급’으로 승승장구 중인 한 신예 스타그룹을 섭외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오너의 한마디에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 “걔네가 누군데? 유명한 애들이야?”

이 회사는 몇 년 전 드라마에서 커리어우먼 역할로 인기를 끌었던 탤런트 L에게 제대로 꽂혀 수년째 전속모델로 쓰고 있다. 문제는 활동이 뜸해진 L은 광고모델로서의 매력이 뚝 떨어졌다는 점. “교체할 시점이 됐다”고 직언을 해 봐도 돌아오는 건 “마케팅은 내가 더 잘 알아”라는 독설뿐. 지인들에게 “거긴 왜 그렇게 올드한 모델을 계속 써?”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W의 답변은 하나다. “…그냥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CEO가 둘…어느 장단에 춤추나

창립 40주년을 맞아 기업이미지(CI)를 바꾸려는 중견기업 P사는 ‘공동 대표’를 맡고 있는 두 CEO의 의견이 오락가락해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경우다. 디자인 업체에서 받은 몇 가지 시안을 놓고 공채 출신으로 CEO 자리에 오른 김 대표와 외부에서 영입된 유학파 전문경영인 정 대표가 엇박자 의견을 내고 있는 것.

김 대표는 “회사의 정체성을 이어가야 한다”며 글꼴만 살짝 바꾼 CI를 선호하고, 정 대표는 “해외 시장을 염두에 두려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야 하는 만큼 완전히 새로운 CI를 써야 한다”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난감한 건 부하직원들이다. “차라리 두 분이 담판을 지으면 좋으련만…. 따로따로 불러서 ‘이걸 이렇게 수정해’라고 지시하니 눈치만 보여요. 이제는 최종안을 확정해야 할 때인데 걱정이에요.”

대기업은 CEO 얼굴을 마주할 일이 상대적으로 적어 그나마 다행이다. 늘 얼굴을 맞대고 일하는 중소기업에선 스트레스가 두 배가 된다. 지방의 작은 건설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는 이 주임은 비품 하나 살 때조차 ‘매의 눈’으로 감시하는 박 사장의 잔소리에 이골이 났다. “이 회사는 내가 맨주먹으로 20년 넘게 일군 곳”이라는 박 사장의 자부심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은연중에 부하 직원들이 회사 돈을 낭비하진 않는지 ‘감시의 대상’으로 삼는 박 사장의 태도는 정말 참기 힘들 때가 많다고. “커피믹스 먹을 때는 개인별로 사용량을 적은 뒤 월말에 정산해요. 볼펜은 ‘모나미 153’만 사야 하고요. 잉크 다 떨어졌다고 새 볼펜 사면 큰일나요. 심만 갈아요. 점심 때 6000원 이상 메뉴 시키면 사장님 눈에서 레이저 나와요. 이 회사, 오래는 못 다닐 것 같네요.”

임현우/전예진 기자 tard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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