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택수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서민·기업 어려운데…은행들 샤일록처럼 하면 안돼”

한경과 맛있는 만남

中企인들 자신감 많이 떨어져…기업 힘들때 은행이 도와야
기자시절 동료기자 폭행 당하자 항의로 총리 선물 내동댕이 쳤지
국회는 막연한 보람 있지만 재미는 신보가 훨씬 나아

지난 21일 저녁, 예정 시간보다 10분 일찍 안택수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이 서울 공덕동 본사 빌딩 뒤편에 있는 참복집에 나타났다. 안 이사장이 ‘맛있는 만남’의 장소로 복요리집을 선택한 이유가 뭘까.

“이 집 요리 한번 들어 보소. 복요리 중에는 이 집이 제일 잘하요. 내가 술을 먹은 뒤 해장 삼아 복요리를 좋아하는데, 이 집은 양식이 아닌 활어를 써요.” 그는 복소금구이 불판이 달궈지자 어서 들라고 재촉했다.가까이에서 본 3선 국회의원 출신의 안 이사장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시종일관 미소 짓는 얼굴에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 “~했소. ~보소. ~하요”라는 옛 말투가 정겨웠다.

15~17대 국회의원 시절 국정감사장에서 피감기관 사람들을 호통치던 강단 있는 모습, 한나라당 대변인을 하면서 날선 비판으로 대여 공세의 선봉에 섰던 모습은 그의 미소 뒤편에 숨겨져 있는 듯했다. 그가 신보 이사장에 취임하자 언론에서 ‘낙하산’이라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2009년 국내 중소기업 대출 순증액 21조1000억원의 41.7%인 8조9000억원의 보증을 지원하며 글로벌 금융위기 때 소방수 역할을 톡톡히 해 그런 비판을 잠재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내가 내년에 나이가 70세입니다. 만으로는 정확히 68세1개월입니다. 내가 살아보니까 양보도 할 줄 알고 시대정신에 맞게 살아가는 것도 좋은 것이라고 봐요. 인생이라는 게 별거 아닙디다.”그는 이 대목에서 ‘인생은 초로(草露)’라는 표현을 썼다. “풀 초(草)에 이슬 로(露), 인생은 아침이슬처럼 고였다가 해만 뜨면 말라 없어지는 것이지요. 자기 인생에서 큰 기대를 갖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생의 어려움과 한계를 이해하고 승복하면서 자기 선택을 바꿀 줄도 알아야 합니다.”

안 이사장은 1968년 1월4일 한국일보 21기 견습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디뎠다. 정치부, 사회부 차장을 거쳐 1980년 한국기자협회장을 지냈다. 1982년부터 5년간 보건사회부 공보관(대변인)을 했고, 국민연금공단 재정이사를 거쳐 1996년 정계에 투신했다.

정치판에서 그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대정부 질의에서 한나라당을 ‘차떼기 당’이라고 비판한 당시 이해찬 국무총리와 각을 세운 설전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회자되고 있다.안 이사장은 어렸을 때 명의(名醫)가 돼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자유당 정권 아래에서 청송, 봉화, 영천군 등 3곳의 군수를 역임했던 아버지가 무고하게 강제 퇴직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 꿈을 접었다. 대신 사회를 고치는 정치인이 되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가난했던 탓에 대학교 재학 기간 4년 중 3년을 입주 가정교사로 지냈다고 한다.

“취직시험을 여러 번 봤는데 다 안되더라고. 당시 정치학과 졸업생이 갈 수 있는 직장은 딱 3군데였습니다. 고시공부를 해 공무원이 되거나, 한국은행에 취업하거나, 신문기자가 되는 거였습니다.” 그는 고민 끝에 기자가 됐다. 정치인이 되는 데 필요한 공부도 많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안 이사장이 기자로 일하던 시절 얘기를 꺼냈다. 그는 “내가 여러 가지 ‘사고’를 쳤지”라며 잔을 들이켰다. 중앙청 출입기자였던 1971년 얘기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최시중 씨(현 방송통신위원장)가 정부 부처 행정조직 통폐합과 관련한 개혁 방안을 보도해 특종을 했다. 그런데 다음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정부 기밀을 누설했다고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최 위원장이) 나중에 기자실에 왔는데 얼굴에 시퍼렇게 멍이 다 들었더라고.”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는 서둘러 출입기자들에게 저녁 식사를 샀고 선물까지 증정했다. 확 열받은 그는 “출입기자를 개 잡듯이 패더니 밥 먹고 돌아갈 때 이렇게 선물을 줘? 에라이 난 안 받는다”며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선물은 박살이 났다. 오가피술이었다.

기자와 국회의원, 금융공기업 최고경영자(CEO) 가운데 어느 쪽 일이 가장 보람있는지 물었다. “국회는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막연한 보람 뭐 그런 게 있었지. 그런데 실제로 일하는 재미는 신보가 훨씬 더 낫죠.” 안 이사장은 주요 공공기관장으로는 드물게 지난 7월 연임됐다.

안 이사장은 현장을 중시한다. 최근 한 달 동안 전국을 8개 권역으로 나눠 100여명의 기업인을 만났다. 지난달에는 김석동 금융위원장과 1박2일 중소기업 현장체험 버스 투어에 합류했다. 이후에도 따로 8번이나 기업들을 더 찾았다.

1박2일 동안 전국을 돌았던 버스 투어에서 안 이사장은 현장에서 느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며 메모해놓곤 했다.

그는 현장의 소리를 듣고 떠오른 아이디어를 바로 실행에 옮긴다. 국내 최초로 만든 중소기업 대출거래 사이트 ‘온라인 대출장터’가 대표적이다. 현재 은행 카드 대부업계 등에서도 비슷한 시스템을 도입해 금융소비자들에게 조금 더 낮은 금리로 대출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는 내년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고 했다. “중소기업을 하는 분들이 지금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돈을 쓸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신규 투자할 엄두를 못내는 거지요. 보증 수요도 감소하는 추세고.”

그는 내년 중소기업 상황이 걱정스러운지 한동안 음식에 손을 대지 못하고 말을 이어갔다. “양극화가 서서히 심해지고 중산층이 점점 얇아지고 있어 걱정이에요. 싸워서 이기는 사람만 살아남고. 떨어지는 사람은 완전히 낙오하는 적자생존의 시대가 돼 가는 거지. 이것은 경제적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예요. 이런 것들이 사회 불만으로 이어져 악순환이 증폭됩니다.”

그는 이런 때일수록 은행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시중은행들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했다.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한 해 순대출 증가액 21조1000억원 가운데 신보가 보증한 것이 42%, 지역 보증재단 보증이 24%, 기보 보증이 22%였습니다. 은행이 순수하게 보증 없이 신용으로 대출해준 것은 12%밖에 안 됩니다.”

그는 “국민과 국가에 의해 허락을 받고 돈벌이를 하는 은행이 국가와 국민이 이렇게 어려운데 자기 리스크는 떠안지 않으려 하고 그냥 안전한 돈벌이에만 전력한다면 은행의 존재 가치에 대해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 아닌가요”라고 되묻기도 했다. 안 이사장은 “은행들이 샤일록(소설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처럼 하면 안 된다”고까지 말했다.

그는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서 ‘상호신용금고’ 명칭을 ‘저축은행’으로 바꾸면 안 된다고 주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복소금구이를 젓가락으로 집으며) 그때 이게(저축은행 사태) 터질 줄 알았지. 이놈들은 항상 사고를 치는 놈들이니까”라고 말했다.

안 이사장은 2000년 당시 재정경제부가 상호신용금고의 명칭을 저축은행으로 변경하는 안을 가지고 오자 “금고를 저축은행으로 이름을 바꾸면 서민들이 은행으로 알고 마구 돈을 넣을 텐데, 상호신용금고 사람들이 맨날 사고를 치는데 책임질 수 있느냐”고 정부를 몰아세웠다고 했다. 결국 저축은행 앞에 ‘상호’를 붙이는 수준에서 절충이 이뤄졌다고 했다.

복지리가 상에 올랐을 때 정치인 안택수의 선택에 후회가 없는지 궁금해졌다. 대구 출신인 안 이사장은 지난 대선 후보 경선 때 같은 지역에 속하는 박근혜 후보가 아닌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다. 왜 그랬을까.

"이마에 있는 점 빼면 아마 신문에 나올 걸요"

“2007년 초 한국의 경제 상황은 요즘처럼 아주 좋지 않았어요. 경제를 좀 아는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표는 젊으니까 5년 동안 경제를 잘 닦아 놓은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고 봤지.” 그는 고심 끝에 당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하고 박근혜 후보를 만나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대선에서는 대구지역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으며 이명박 후보의 당선을 위해 뛰었다. 하지만 이듬해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고 후배들에게 길을 터줬다.

이 대통령에 대한 그의 평가는 어떨까. “당시 선택을 후회하지 않나”고 우회적으로 묻자 “경제와 외교 안보는 괜찮은 편인데 정치와 인사 문제는 (바깥에서) 말이 좀…”이라며 에둘러 말했다.

어느새 복 소금구이와 튀김, 지리가 담긴 쟁반이 거의 비워진 뒤 김이 살포시 얹혀 있는 초록 빚깔의 죽이 나왔다. 안 이사장 하면 떠오르는 ‘이마의 점’에 대해 물었다. 간단한 시술로 없앨 수 있는데도 지금까지 그대로 두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복점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걸까.

“이게 내 트레이드 마크요. 사람들이 어딜 가도 다 내를 알아보는 게 이 점 때문이지.”

집에서 점을 제거하라는 ‘압력’이 없었느냐고 물었다. “말도 마소. 맨날 시달리지. 집사람하고 자식들은 보기 흉하다고 빼라고 합디다. 사촌 동생이 피부과 의사인데 나만 보면 ‘형님 당장 떼십시다’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점을 안 뺀 이유는 지난 2월에 돌아가신 어머니 때문이었다고 한다. 불교신자였던 어머니가 ‘점이 있는 얼굴이 석가모니를 닮았다’며 절대로 빼면 안 된다고 했다는 것. 안 이사장은 “그동안 어떻게 할 줄 몰라 안 떼고 있었는데, 요즘 같아서는 살 만큼 살았는데 이제 떼도 안 되겠나 싶네”라며 “내가 이 점을 떼면 뉴스거리요”라고 크게 웃었다.

2012년은 정치의 계절이다. 언론인과 정치인을 두루 지낸 그에게 ‘안철수 신드롬’에 대해 물었다. 그는 대뜸 “철수가 뜨니깐 택수가 집에 가게 생겼다”고 했다. 안철수 교수가 주목받으면서 자신처럼 나이가 든 사람들이 모두 퇴물 취급을 받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안 이사장은 “안철수 현상이 정치판을 온통 신인으로 바꾸어 놓을 판”이라며 “그러면 또 정치가 후퇴하고 시행착오가 나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국회의원에 다시 출마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지난 6월 신보 이사장 연임을 받아들인 것이 정치의 꿈을 접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어느덧 3시간이 흘렀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고통받고 있는 청년들에게 해줄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국 철학자 프라케트의 말을 인용했다. “한 가지 뜻을 세우고 그 길을 걸어가라. 잘못도 있으리라, 실패도 있으리라. 그러나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가라.”

안대규/류시훈 기자 powerzanic@hankyung.com


안택수 이사장의 단골집 참복집

전남 청정해역서 재료 공수…담백한 복국물맛 '으뜸'

‘참복집’은 마포 공덕동 신용보증기금 뒤편에 있다. 완도가 고향인 부부가 이곳에서만 22년째 영업 중인 복요리 전문집이다. 활어복지리(3만5000원)와 복소금구이(2만4000원)는 순수하고 담백한 맛으로 인기가 있다. 활어보양탕(3만5000원)은 전복 인삼 밤을 함께 넣은 보양식이다.

참복집이 자랑하는 맛의 비결은 음식의 간을 단맛 나는 소금으로 하는 데 있다. 전남 신안에서 천일염을 공수해 2년간 간수를 빼내면 소금에서 단맛이 난다고 한다. 복 소스는 전남 완도의 유자를 사용해 새콤한 맛을 내고, 식사로 나오는 복죽에는 고향 완도에서 직접 가져온 매생이를 쓴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아가미젓갈, 배추나물, 갓김치가 입맛을 돋운다. (02)702-1953안택수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약력

▶1943년 경북 예천 ▶경북고 서울대 정치학과 학사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한국기자협회장 ▶보건사회부 공보관(대변인) ▶국민연금공단 재정이사 ▶제15, 16, 17대 국회의원(대구 북을) ▶한나라당 대변인, 정책위 부의장 ▶국회 재정경제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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