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여행] 충남 홍성(下)…님이 떠난 자리, 詩碑만 남아 침묵을 지키네

황량했던 옹암포구, 토굴 새우젓으로 활기…구수한 맛 전국서 찾아
청룡산 조촐한 고산寺…비탈에 서 있어도 품위
만해 생가엔 결기 서려…보석 같은 詩 읊어보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만해 한용운 '님의 침묵' 中-

홍성군 광천읍 옹암리 독배마을을 찾아간다. 토굴 새우젓으로 잘 알려진 마을이다. 옹암리는 1931년 장항선 개통으로 광천이 내포의 경제 중심지이자 교통요지가 되면서 덩달아 번영을 구가하던 포구였다. 그러나 점점 토사가 쌓여가고 2000년 말에 완공된 보령방조제가 물길을 막음으로써 완전히 폐항이 되고 말았다. ◆토굴 새우젓으로 활기를 되찾은 옛 포구마을

옹암포의 명성을 되살린 것은 독배마을의 토굴 새우젓이었다. 광천시장에서 새우젓 냄새를 실컷 맡은 후 읍의 남쪽 끝에 있는 독배마을로 향한다. 독배마을은 도로를 따라 집들이 늘어선 가촌(街村)이다. 새우젓집 간판을 달지 않은 집이 드물다. 1960년대 윤병원 씨(2001년 작고)가 금광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토굴 새우젓을 고안한 게 시초였다. 폐광 안에 50~60개의 새우젓 독을 저장했더니 뜻밖에 맛이 좋았던 것이다. 이후 마을 사람들이 그를 벤치마킹하기 시작함으로써 토굴 새우젓 동네가 됐다.

3대째 새우젓 장사를 한다는 신근석 씨(57)의 토굴을 찾았다. 12년 전에 팠다는 토굴은 길이가 271m나 되는데 하도 여러 갈래로 뚫려 있어 미로를 찾아가는 느낌이다. 지금 독배마을에는 이런 토굴이 40개 이상 있다. 1만5000여드럼(3750t)의 새우젓을 저장할 수 있는 규모다. 계절에 상관없이 온도가 섭씨 14~15도로 일정하면서 습도가 85% 이상인 토굴은 새우젓 숙성에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을 갖춘 곳이다. 3개월가량 토굴에서 숙성시키면 구수한 젓갈 맛을 내는 광천 새우젓이 되는 것이다. 광천 새우젓 상품은 1㎏에 4만5000원을 호가한다. 독배마을의 남쪽 끝에는 광천 옛 장터에서 옮겨온 '증군무참의김공병돈유공지비'라고 새겨진 '보부상감의비(褓負商感義碑)'가 서 있다. 이 비는 부보상들이 동학농민운동 당시 광천 등지에서 전공을 세우고 신례원에서 전사한 부상 출신이었던 중군 김병돈의 공을 기리기 위해 1896년에 세운 것이다. 부보상들의 의리가 얼마나 끈끈한지 알 만하다.

◆옛 결성현의 숨결과 흔적을 찾아서

조선시대 결성현의 중심지인 결성면으로 발길을 옮긴다. 형방청 · 동헌 · 책실(冊室)이 있는 석당산 기슭으로 올라간다. 맨 먼저 나그네를 맞는 건물은 일제강점기부터 1984년까지는 결성지서로도 쓰였던 'ㄱ'자형 건물인 형방청이다. '一'자형 건물인 동헌 마루에 올라서니 면 소재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무생물인 건물에서마저 '실세'의 논리를 읽는다. 부속건물인 형방청이 동헌보다 규모가 크고 짜임새 있기 때문이다. 둘레가 약 1007m(3325척)였다는 결성읍성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아쉬운 마음을 뒤에 두고 교동마을 북쪽의 야산 기슭에 있는 향교를 거쳐 금곡리 농요전수관을 찾는다. 마침 전수관은 구제역 때문에 휴관 중이다. 일찍부터 농경문화가 발달한 결성지역은 농요도 함께 발달해온 곳이다. 모 심는 소리인 '어럴럴럴상사디'나 논 매는 소리인 '얼카덩어리'를 직접 들을 수 없는 게 유감이다.

신금성과 동헌이 있었던 17세기 결성현의 '다운타운' 금곡리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청룡산(236m) 고산사를 찾아간다. 가파르기 짝이 없는 오르막길을 잘 빠진 소나무들이 동행해준다. 비탈에 서 있어도 품위를 지킬 줄 아는 고사(高士)다. 고산사는 전각이라곤 조선 초기에 지은 대웅전(보물 제399호)뿐인 조촐한 절집이다. 주심포계의 건축양식과 다포계의 건축양식을 혼합한 대웅전 귀기둥의 공포가 무척 아름답다.

대웅전 안에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있다. 어라,아미타불이 주존이면 극락전이 아닌가. 그러나 좌복에 무릎을 꿇고 앉은 젊은 보살은 지극정성으로 기도할 뿐이다. ◆'식민지 시대의 등불' 만해의 생가 터

결성면 성곡리 야산을 등지고 앉은 만해 한용운(1879~1944) 생가에 닿는다. 1992년에 복원한 생가는 방 2칸짜리 초가다. 몰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난 만해의 어린시절은 궁핍했다. 부모님과 열아홉 살 위의 형 부부,조카들까지 한집에 살았으니 잠결에 등 돌리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만해는 여덟 살 때 홍성 아전 군속으로 취직한 아버지를 따라 홍성읍 남문리로 이사했다. 이곳에 살았더라면 그의 민족의식은 끝끝내 개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19세에 처음 불문에 든 만해는 백담사 등지에서 머물다가 1933년에 지은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1944년 법랍 40년,세수 66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생가 뒷산 기슭의 민족시비공원에 늘어선 20여개의 시비를 둘러본다. 첫머리에 만해의 '복종'이라는 시가 서 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는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시 '복종' 부분)

복종과 불복종의 대상을 명확히 가를 줄 아는 명료한 의식이 감탄스럽다. 이렇게 결기 있게 한 생을 살았던 만해가 있어 우리는 식민지의 폐허에서도 보석 같은 시와 정신적 자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나 보다.

◆포구엔 새조개 껍데기만 수북이 쌓이고

서부면 남당포구는 새조개 산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18세기 기호유학을 대표하는 유학자 남당 한원진(1682~1751)의 고향이기도 하다. 남당포구란 이름도 그의 호를 따 지은 것이다. 남당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다르다는 인물성이론을 주장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했던 유학자였다. 여기서 멀지 않은 신리 · 양곡리에 선생의 묘와 사당이 있지만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포구는 울긋불긋한 현수막과 간판을 단 새조개 집과 포장마차들로 넘쳐나고 있다. 횟집만 120~140개를 헤아릴 정도라고 한다. 가게 앞마다 수북이 쌓인 새조개가 맛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조갯살이 새와 비슷하게 생긴 새조개는 비린 맛이 없는데다 연하고 부드럽다. 발에 해당하는 새 머리 모양의 가지색이 짙을수록 싱싱하고 맛도 좋다.

새조개는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먹는 샤부샤부가 대세다. 시기적으로는 1~2월에 가장 맛이 좋고 알을 배기 시작하는 3월부터는 살이 질겨지면서 씁쓸한 맛이 난다. 새조개는 바다로 배를 타고 나가 바다 바닥을 긁어 조개 등을 채취하는 형망(끌방)으로 잡는데 올해는 작황이 좋지 않아 ㎏당(내장 제거 후 500~550g) 5만5000원 선에 거래된다. 갯가에는 새조개 껍데기가 패총처럼 쌓여 있다. 활처럼 휘어진 해안의 남쪽 끝으로 시선을 주자 보령시 천북면 수룡항이 보인다. 바로 앞바다에서 어린 거북 같은 작은 섬 죽도가 놀고 있다. 대나무가 많아 조선시대엔 죽전(竹箭)을 생산하던 섬이다. 좌측에 펼쳐진 얕은 산줄기들로 시선을 돌리자 억새밭으로 잘 알려진 오서산이 보인다. 집채만한 너울 같다.

온기만 찾는 삶은 부패하기 십상이다. 이를테면 차가움은 일종의 방부제 같은 것이다. 그렇더라도 차가운 바닷바람을 실컷 쐬고 나니 뜨끈뜨끈한 방바닥 생각이 간절한 건 인지상정이다. 따뜻한 방에서의 부패를 꿈꾸며 귀가를 서두른다.


쫄깃쫄깃 부드러운 건복어탕 한끼 뚝딱

◆ 맛집

홍성군 갈산면 상촌리 갈산농협 앞 삼삼복집(041-633-2145) 반찬은 오이 김치 등 딱 세 가지뿐이다. 쉽게 맛볼 수 없는 '건복어탕'이 이 집의 별미다.

쫄깃한 듯 부드러운 건복 맛도 좋지만 된장과 고춧가루를 풀고 미나리 대신 아욱을 넣어 빚어내는 시원한 국물 맛이 일품이다. 건복어탕 1만5000원,생복어탕 1만5000원.

◆ 여행정보

홍성군 서부면 남당항에서 약 3.7㎞ 떨어진 죽도는 홍성군에서 유일한 유인도다. 섬 주위에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죽도라 불린다. 올망졸망한 8개의 섬이 달라붙어 있으며 24가구 70여명이 사는 유인도로 물이 빠지면 걸어서 돌아볼 수 있다. 배를 타고 15분 정도 가야 하는데 죽도에 들어가는 배편은 이성준 죽도리 이장(011-235-4971)을 통해 마을어촌계의 어선을 이용하면 된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선상 바다낚시는 물론 양식장에서의 좌대낚시를 모두 즐길 수 있으며 해돋이와 해넘이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오서산은 홍성지방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능선이 용의 머리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용허리나 대문바위,신랑신부바위,농바위 등과 같은 단애,암봉,암주들이 산행의 피로를 씻어준다. 가을의 은빛 갈대숲이 아름다운 것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봄 산행도 그에 못지않다.

◆ 찾아가는 길서해안고속도로→광천IC →96번 지방도(광천/ 청양방면)→광천읍

안병기 여행작가 smreoquf@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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