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화 명작 기행] 베네치아 산마르코 성당…18세기 풍경화는 '기념사진'이었다

베네치아에 몰린 영국인 관광객, 현지 화가에게 정교한 그림 주문
카날레토의 풍경화 '인기몰이'
지난 주까지 '해외 문화기행'을 연재한 미술사학 박사 정석범씨가 이번 주부터는 새로운 기획인 '풍경화 명작 기행'으로 독자들과 만납니다. 세계 미술사에 빛나는 풍경화 속의 사연과 화가들의 에피소드,시대적 배경과 공간적 의미,인문학적 깊이 등을 함께 녹여내며 여러분의 주말 아침을 한층 더 풍요롭게 해드릴 것입니다.


유럽의 미술관을 순회하다 보면 18세기 베네치아의 풍경을 그린 그림들과 자주 마주치게 된다. 웬만큼 규모 있는 미술관이라면 카날레토(1697~1788)나 프란체스코 구아르디(1712~1793)가 그린 작품 한두 점쯤은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유럽 전역에서 광범하게 발견된다.
이 그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건물들의 세부가 상당히 정밀하게 묘사돼 있다. 그것은 마치 감상을 위한 그림이라기보다는 신축 건물을 위한 정밀한 투시도처럼 보인다. 왜 이런 종류의 그림들이 베네치아에서 대량으로 제작된 것일까.

18세기 베네치아는 때 아닌 관광객 쇄도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해외 식민지 경영으로 부를 축적한 영국인들을 중심으로 대륙 여행 붐이 일고 있었는데 가장 인기 있는 방문지는 로마와 베네치아,피렌체 등 이탈리아 도시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단연 여행 1번지로 손꼽혔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베네치아의 풍광과 삶의 방식은 지극히 이국적인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베네치아에서 길은 땅이 아닌 바다로 뚫려 있었다. 땅은 잠시 거쳐 가는 곳일 뿐 그네들의 삶의 대부분은 물 위에서 이뤄졌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평생 몸을 좌우로 간단없이 추슬러야 하는 육지인과는 다른 전도된 삶을 보고 어찌 열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서구에서는 보기 어려운 아라비아 양식,유대 양식의 독특한 건축물들이 서구 기독교 양식과 어울려 자아내는 기묘한 분위기는 이방인의 뇌리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방문객 중에는 부유한 귀족과 상인뿐만 아니라 견문을 넓히기 위해 장기 체류를 목적으로 방문한 명문가의 자제들도 많았다. 이들은 여행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서도 저마다 이 이국적인 아름다운 도시를 오래도록 추억하고 싶어했다. 그 중에는 현지 화가를 고용해 산마르코 성당이며 두칼레궁전이며 산조르조 마조레 성당을 그려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그것은 일종의 기념엽서 내지는 기념사진이었다.

카날레토라는 한 젊은 화가도 우연히 이런 풍경화를 주문받게 됐다. 그는 20대 중반까지 아버지를 도와 오페라 극장의 무대배경을 그렸는데 틈틈이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기도 해서 새로운 조류에 부응할 수 있는 이른바 '준비된 화가'였다. 이 때 그가 그린 풍경화는 일반 풍경화와는 달리 연극 무대처럼 드라마틱했다. 산마르코 광장과 리알토 다리 주변의 대운하는 살아있는 오페라의 무대가 됐다.

그는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맑게 갠 푸른 하늘을 화면 상단에 널찍하게 배정했고 빛과 그림자의 명암을 절묘하게 대비시켰다. 군더더기는 제거하고 곤돌라 같은 로맨틱한 회상의 매개체들을 부각시킴으로써 무대효과를 극대화시켰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잘 차려입은 신사 숙녀들로 채워졌다. 고객이 그 가상의 무대 위를 기분 좋게 마음으로 소요하게끔 배려한 것이었다. '산마르코 성당과 투칼레궁 풍경'(1730년 이후)은 그와 같은 카날레토 풍경화의 원리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화면 상단의 절반 가까운 공간이 푸른 하늘에 할애돼 있다. 그 아래에는 왼쪽의 산마르코 성당과 오른쪽의 두칼레궁이 나란히 바다를 향해 후퇴하고 있다. 극도로 정교하게 묘사된 두 건물은 연한 핑크빛을 띠고 있어 하늘의 푸른색과 상쾌한 보색 대비를 이루고 있다.

건물 앞의 산마르코 광장에는 이국적 정취에 흠뻑 빠진 여행객과 베네치아의 신사 숙녀들이 그려져 있다. 군데군데 보이는 노점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어 정겹다. 오른쪽 저 멀리 바다위에 범선과 곤돌라들이 보인다. 베네치아에서의 삶을 추억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수단이 또 어디에 있을까.

카날레토의 고객만족 마케팅은 대성공이었다. 반응은 가히 열광적이었다. 폭주하는 주문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일복이 터졌다. 유럽의 왕과 유력 귀족들이 그의 그림 한 점을 얻기 위해 자세를 낮췄다. 그의 그림은 그렇게 영국으로,네덜란드로,스페인으로 비싼 값에 팔려나갔다. 거장이 거쳐 간 도정에는 언제나 아류들이 짙은 먼지를 일으킨다. 카날레토가 일으킨 베네치아 풍경화 붐은 물의 도시가 18세기 말 나폴레옹의 말발굽에 스러지기 전까지 근 한 세기 동안 수많은 추종자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구아르디 외엔 카날레토에 필적할 만한 작품을 내놓지 못했다. 그들은 카날레토의 외형을 흉내내긴 했지만 이방인의 이국정서를 자극할 만한 드라마틱한 무대효과의 본질을 간파하진 못했던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도서출판 이레)에서 이렇게 말했다. "플러그 소켓,욕실의 수도꼭지,잼 담는 용기,공항의 안내표지판은 디자이너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얘기해줄 수 있다. 더 나아가 그것을 만든 나라에 대해 이야기 해줄 수도 있다. "

카날레토는 그와 같은 평범한 진리를 이미 체득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의 그림 속에 가득한 이국적 시각 기호들은 그 살아있는 증거다. 그래서일까. 카날레토의 풍경화는 결코 감상자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자,오늘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카날레토가 꾸며놓은 산마르코 광장의 무대 위를 산책함이 어떨까.

정석범 <미술사학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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