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워크숍·야유회의 추억‥뒤끝있는 야자타임 "야유회가 황사보다 무섭다"

멋모르는 신입의 직언‥
큰맘먹고 "회사 망한다" 지적
"쥐뿔도 모르는게" 반응만

남들 놀때 실력 발휘‥
모두 꺼리던 PT 맡았더니
사장에게 깊은 인상…승진까지

워크숍 및 야유회의 계절이다. 따스한 햇살과 향기로운 봄바람….겨우내 콕 박혀 있던 사무실에서 벗어나 공기 좋은 곳을 찾아 떠나는 것만으로도 김 과장,이 대리의 마음은 설레게 마련이다. 죽도록 미웠던 상사나 선배에게도 술의 힘과 야전(野戰)이란 핑계를 대고 한번쯤은 살짝 받아볼 수 있는 자리,평소 찜했던 이성 후배나 선배에게도 들이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곳도 바로 워크숍이나 야유회 자리다.

하지만 오버는 절대 금물.워크숍 및 야유회의 필수 코스인 술자리에서 한두 잔 주거니 받거니 하며 꽃향기와 사람에 취해 적과 동지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순간,어김없이 비극은 탄생한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직접 보거나 들어 봤을 워크숍과 야유회의 전설.대낮부터 거나하게 취해 고래고래 "사장 나오라고 해"를 되풀이하는 김 과장,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야자타임'의 희생양이 되는 순진한 이 대리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샐러리맨들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절대 굴하지 않는 그대 이름은 '용자'

어느 조직이나 용자(勇者)는 있다. 용자의 진가는 워크숍이나 야유회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야자타임'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존칭을 떼고 이름을 부르는 야자타임은 서열 관계를 뒤집어 스트레스를 풀자는 데 목적이 있다. 어색하게 끝나지 않는 야자타임을 손에 꼽기 어렵지만,그래서 야자타임은 더욱 매력이 있다. 야자타임은 항상 뒤끝이 남는다는 반복학습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용자는 오늘도 부장에게 어김없이 선방을 날린다.

5년차 은행원인 한기인 대리(33)는 작년 이맘 때 워크숍에서 큰 실수를 저질렀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야자타임이 돌아오자 "이○○(부장의 이름)! 네가 할 일을 너무 아랫 사람한테 떠넘기는 거 아니냐"고 크게 외쳐버린 것.주변에선 황급히 말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 대리는 다음 날 아침 식사 자리에서 부장을 찾아가 "어젯밤 정말 죄송했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지만 부장은 싸늘하게 쏘아보곤 시선을 돌려 버렸다. 워크숍 전까지 나름대로 인정받는 에이스였던 한 대리의 은행 생활은 이후 고난의 행군으로 급변하고 말았다. ◆말 대신 주먹,술잔 대신 발길질

워크숍 및 야유회의 백미는 누가 뭐래도 뒤풀이 술자리다. 하지만 술자리는 예기치 못한 불상사가 발생하는 근원지이기도 하다. 국내 한 대기업 마케팅 부서에 근무하는 이모 대리(31)에게 워크숍은 공포의 대상이다. 부장은 1년에 두 번 있는 워크숍 때마다 부원들에게 "그동안 느낀 불만을 솔직하게 얘기해 보라"고 권한다. 부원들이 쭈뼛쭈뼛 망설이면 "이런 데까지 와서 그럴 필요가 있느냐?","왜 나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느냐?"고 분위기를 유도한다.

일부 고참들이 먼저 그동안 쌓인 불만을 털어 놓기 시작하면 얘기는 봇물 터진 듯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럴 때면 이 부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버럭 화를 내기 시작하고,그때부터 분위기는 급격하게 냉각된다. 재작년 연말 워크숍 때는 선임 과장이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 부서장에게 주먹질과 발길질까지 당하는 불미스런 사태가 발생하면서 워크숍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기도 했다. 이런 사태가 한두 번 반복되면서 이 대리를 비롯한 부원들은 워크숍 일정이 잡히면 어떻게든지 핑곗거리를 찾기에 바쁘다. 죽지도 않은 친척이 상을 당했다고 거짓말을 하는가 하면,다음 날까지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업무를 일부러 만들어 내기도 한다.

◆워크숍 PT 한번으로 사내 위상 '업'

중견기업에 다니는 최준모 과장(35)은 우연찮게 기회가 찾아온 워크숍 PT(프레젠테이션) 한번으로 사내에서 발딱 일어섰다. 최 과장은 재작년 워크숍에서 '위기관리 대응'이란 주제로 PT를 해 사장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원래 팀장이 해야 할 PT였지만,팀장은 최 과장에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일을 넘겼다. 반강제적으로 일을 떠넘겨 받은 최 과장은 평소 읽었던 책과 신문 기사를 참고해 그럴 듯한 PT 자료를 만들었다. 사장은 당초 워크숍에 참석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느닷없이 행사에 참석하면서 최 과장은 입사 이후 처음으로 사장 앞에서 PT를 하게 됐다. PT를 인상깊게 본 사장은 3개월 후 그를 경영본부 기획실로 발령냈다. 최 과장은 "당시 PT를 떠넘긴 팀장은 아직도 무릎을 치면서 후회한다"며 "워크숍이 내 인생을 바꿔놓은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고 말했다.

◆믿었던 당신이 이럴 줄은…

워크숍은 일탈이 일어나기 쉬운 공간이기도 하다. 회사라는 공식적 공간을 벗어나는데다 술이라도 몇 잔 들어가면 사고가 일어날 소지는 더 커진다. IT(정보기술)기업 마케팅 담당인 김모 대리(여 · 28)는 1박2일로 치러진 작년 봄 회사 워크숍을 '악몽'으로 기억한다. 숙소에 들어가 잠들려는 찰나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졸린 눈으로 열어보니 상무가 서 있었다. 상무는 "술이나 같이 한 잔 할까 하는데…"라며 다짜고짜 문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머리털이 곤두 선 김 대리는 "왜 이러시느냐"며 억지로 문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했다. "마침 복도 끝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모른다"며 김 대리는 지금도 가슴을 쓸어 내린다.

◆분위기 파악 못하는 열혈 신입사원

혈기왕성한 신입사원들의 '오버'도 워크숍과 야유회에 빠질 수 없는 추억거리다. 대기업 입사 2년차인 김모씨(30)도 신입사원의 열정을 그대로 표현했다가 경을 친 경우다. 김씨는 작년 신입사원 때 워크숍에 참석해 자유발언 시간에 자신이 3개월간 느낀 조직의 문제점을 10여분에 걸쳐 얘기했다. 좋은 아이디어를 사장한 사례,후배의 공을 가로채는 선배의 못난 모습 등이 낱낱이 공개됐다. 신입사원의 기개도 있었지만 '회사가 이래서는 경쟁에서 밀려난다,이해관계가 없는 신입사원일 때 말해야 한다'는 충성심도 작용했다. 이미 동기들과 상의한 내용이었던 만큼 김씨는 주변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좌중은 싸늘했다. 사장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 사회자도 당황한 눈치였다. 침묵이 흐른 후 다른 선배가 일어나서 "김군이 참 좋은 지적을 해 줬다"며 "다만 아직 회사 생활에 익숙지 않으니 우리 회사에 대해 조금 더 알고 다시 논의해 봤으면 한다"고 지적했다. '까불지 마라'는 우회적인 경고 메시지였다. 김씨는 그날 저녁 술자리에서부터 선배들의 지청구를 한 마디씩 들어야 했다. '쥐뿔도 모르는 게 나댄다'는 평판은 이후 몇 달간 김씨를 괴롭혔다.

이정호/이관우/김동윤/이상은/이고운 기자 dolp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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