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우의 와인 있는 서재] 스페인의 자존심을 약탈한 영국 '셰리 香'에 취하다

⑭ 해적과 셰리 와인
16세기 중반 영국에 살았던 프란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모국에서는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전쟁영웅이자 모험적인 항해사다. 그러나 스페인에선 그의 목에 현상금 600만달러가 걸렸던 파렴치한 해적일 뿐이다. 실제로 드레이크는 영국 정부의 묵인 아래 수차례 스페인 선단을 공격해 많은 재물을 약탈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 여왕도 그의 출항경비를 일부 부담하고 약탈한 물품을 팔아 남은 수익금을 배분받았다.

이런 드레이크가 스페인 와인을 영국에 알리는 데 '일등공신'역할을 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특명을 받은 드레이크는 1587년 스페인 무적함대의 주요 기지인 카디즈항을 공격해 수많은 함선을 불태우고 왕의 수염을 뽑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약탈적 성향이 강한 그는 많은 전리품과 함께 항구에서 선적을 기다리고 있던 '셰리(Sherry)'와인 통 2900개를 싣고 돌아왔다. 셰리가 처음 영국에 소개된 것은 12세기다. 그러나 드레이크가 가져온 셰리의 맛에 취한 영국인들은 이때부터 셰리 열풍에 휩싸인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셰리 와인 맛에 매료됐으며,귀족들 사이에서도 셰리를 마시는 것이 유행이 됐다.

또 셰리의 가격이 물가지수를 산정하는 항목이 될 만큼 서민들도 많이 마셨다. 무역과 상거래에서 화폐를 대신하는 거래단위가 됐으며,심지어 돈과 셰리 중 하나를 선택해 벌금을 내라는 판결도 내려졌다. 셰익스피어는 친구와 술집에서 매일 몇 병씩을 마시고 돌아가 '한 여름 밤의 꿈' '헨리 6세' 등 셰리를 인용한 희곡을 썼다. 페니실린을 발명한 세균학자 알렉산더 플레밍 경도 "만약 페니실린이 아픈 사람의 병을 고친다면 셰리는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다"고 극찬할 정도였다.

셰리는 프랑스의 샴페인,포르투갈의 포트에 비견되는 스페인을 상징하는 와인이다. 그러나 샴페인처럼 맛이 감미롭거나 기포가 살아있지도 않으며 포트처럼 달고 힘이 넘치지도 않는다. 의도적으로 산화시킨 독특한 향에 맑고 차분한 느낌이 드는 와인이다. 적포도로 만들며 발효 중에 브랜디를 넣는 포트와는 달리,청포도만을 사용하고 발효가 끝난 다음 브랜디를 넣는다. 따라서 알코올 농도는 15.5~22도로 약간 높지만,잔여 당분이 거의 없어 달지 않다. 양조 과정 대부분을 손으로 처리하는 섬세한 와인으로,뒷맛이 깔끔해 유럽에서는 식전주로 인기가 높다.

시중에는 알코올과 당도를 달리한 다양한 종류의 셰리가 있다. 그러나 모든 셰리는 맑고 효모향이 강한 '피노(Fino)'와 약하게 산화되어 색이 어둡고 단맛이 있거나 없는 '올로로소(Oloroso)' 두 종류에서 출발한다.

물론 피노와 올로로소의 중간 형태인 '만자니아(Manzanilla)',의도적으로 달게 만든 '크림 셰리(Cream Sherry)'도 있다. 스페인 사람들은 효모향이 강하고 쌉쌀한 맛을 선호하는 데 비해 영국의 은퇴한 할머니들은 단맛 강한 크림 셰리의 열렬한 애주가들이다. 셰리의 고향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헤레즈(Jerez)다. 따라서 영국식 이름인 셰리의 본래 명칭은 '비노 데 헤레즈(Vino de Jerez)'다. 이 지방은 기원전 1100년 페니키아를 시작으로 카르타고,로마제국,이슬람의 무어 왕조 그리고 기독교의 에스파냐왕국 등 3000여년간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가진 나라들이 돌아가며 지배했다. 따라서 독특하고 복합적인 문화가 살아 있다. 사내다움이 돋보이는 시가와 투우를 즐기며 아랍과 집시풍이 어우러진 플라멩코 춤이 시작된 곳이다. 또 음식문화가 발달해 스페인의 유명한 전채인 타파스가 탄생했고,조개와 새우요리가 일품이다. 일반적으로 음식 스타일에는 지방 특유의 기후와 생활문화가 반영되며,특히 토종 와인은 이런 음식과 잘 보완을 이룬다.

스페인에서 한 잔의 셰리는 일상생활의 활력소이자 삶의 의미다. 저녁을 늦게 먹는 스페인 사람들은 초저녁 타파스바에서 셰리 몇 잔을 마신 다음 음식점으로 향한다. 돼지 뒷다리를 훈제해 얇게 썬 하몽은 쌉쌀한 피노와 잘 어울리며,마늘 양념을 한 작은 새우에는 만자니아가 최고의 궁합이다. 신선한 피노와 만자니아는 차게 마시는 것이 좋으며 개봉 후 하루를 넘기지 말아야 한다. 반면 이미 산화된 올로로소와 크림 셰리는 상온에서 마시며 남은 와인을 몇 달간 보관할 수도 있다.

셰리는 전통적으로 좁은 튤립형 몸체에 가느다란 받침이 있는 유리잔 '코피타' 에 4분의 3 정도를 따라 마신다. 만약 코피타가 없다면 작은 화이트와인 잔도 손쉬운 대안이 된다.

/와인 칼럼니스트 · 여유공간 대표 sowhatcho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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