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인사이드] 잠못드는 한은 ‥ '헬리콥터 벤' 처럼 우리도 돈 뿌려야 하나

시중자금 금융권만 맴돌고 경기 추락… 시장 아우성
돈 더풀자니 나중에 거두는 일이 큰 걱정
이성태 총재가 이끄는 한국은행이 깊은 고민에 빠져들고 있다. 전대미문의 경제위기를 맞아 기준금리(정책금리)를 가파르게 내리고 시중에 돈을 쏟아붓는 데도 '약발'이 별로 듣지 않고 있어서다. 실제 한은은 지난해 9월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후 지금까지 기준금리를 연 5.25%에서 연 2.5%로 2.75%포인트나 내리고 원화를 22조원,외화 240억달러(약 33조원) 등 총 55조원을 시중에 뿌렸다. 그런데도 시중자금은 은행 증권사 자산운용사 등 금융권에서만 맴돌고 있다. 한동안 떨어지던 국채 금리도 상승 추세로 바뀌는 듯한 모습이다. 원 · 달러 환율은 연초 이후 오름세를 이어가고 있고 외환유동성이 다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런 와중에 실물경제는 악화일로다. 정부와 시장에선 한은이 금리를 큰 폭으로 더 내리고 자금을 더 공급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한은 관계자들은 토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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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사이드] 잠못드는 한은 ‥ 제로금리 이어 달러 무제한 공급 불사 ◆금리 얼마나 더 내릴 수 있나

한은이 금융시장 동향과 관련해 가장 당혹해 하는 것이 시장자금의 단기부동화다. 대표적인 사례가 머니마켓펀드(MMF)로의 자금 집중.MMF는 지난해 10월부터 50조원이나 늘어 최근 사상 처음으로 110조원을 넘어섰다. 이 기간 중 MMF로 몰려간 자금 중 상당액은 은행 자금인 것으로 한은은 파악하고 있다. 은행들은 한은에서 받은 자금을 다시 한은의 단기조정예금에 맡기기도 한다. 한은이 금리를 내리고 유동성을 공급해도 실물로 흘러들어가지 않는다면 한은의 조치는 큰 의미가 없게 된다.

돈이 금융권에서만 맴도는 사이 실물은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해 4분기 경제성장률이 -5.6%(전 분기대비)이고 국제통화기금(IMF)이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4.0%로 예상하고 있다. 돈을 실물로 흘려보내고 소비와 투자를 촉진시키기 위해선 금리 추가인하가 절실한 상황이다. 문제는 인하 여지가 그다지 크지 않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한은이 추가로 인하해 봐야 그 폭이 0.5~0.75%포인트 수준에 불과할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 이하로 내리면 선진국과의 금리 차이가 없어져 외국자금의 탈출이 우려된다. 이는 환율 상승(원화가치 하락)을 불러올 수도 있다.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 등 실세금리도 기준금리 인하폭만큼 따라 내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소비와 투자가 늘지 않을 것은 물론이다. 이른바 '유동성 함정'에 빠지게 된다. 금융시장이 정상화된 후 무리없이 자금을 회수하는 문제도 한은의 고민거리다.

◆FRB처럼 하는게 정답일까

중앙은행이 금융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은 금리 조정 외 '양적완화(Quantitative Ease)'가 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기업어음(CP)을 사들이고 국채를 매입하는 것이 양적완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한은도 비상 상황에 접어들면 이런 카드를 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재는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게 한은의 판단이다.

한은 간부들은 이보다도 한은이 영리기업에 대출을 하고 국채를 대거 사들이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이 총재는 "요즘은 사람들이 중앙은행이 할 수 없는 일까지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선진국 대부분에선 중앙은행이 정부에 대출해주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국채 매입도 금기시하고 있다는 것이 한은의 전언이다. 이 총재는 "미국이 처한 상황과 한국의 상황이 천양지차인데 사람들이 한은을 자꾸만 FRB와 비교한다"며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한은은 기업 회생의 역할을 정부가 맡아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망해서는 안될 기업이 있어서 일시적으로 유동성을 보강해 줘야 한다면 한은이 그 역할을 맡을 수 있지만 기업을 살리고 죽이고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정부와 민간은행의 몫이라는 얘기다. 한은 간부들은 금융위기 초반에 한은이 적잖은 역할을 한 만큼 이제 정부가 재정을 투입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시기라고 보고 있다. ◆한은법 개정은 어떻게

금융위기에 한은이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은법 개정 논의가 진행 중이다. 한은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한은법 1조 목적 조항에 '물가안정'만 있으나 '금융안정'을 넣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또 영리기업(구체적으론 2금융회사)에 대한 자금 투입을 지나치게 까다롭게 만든 80조도 손질할 필요성이 있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한은법을 개정하면서 정부의 영향력이 확대되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한은은 여기에다 제2금융사에 대한 여신을 위해선 자료제출요구권을 가져야 하는 데 금융감독원이 벌써부터 반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다. 한은은 현재 저축은행 등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관련 정보 등 핵심정보를 직접 수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한은 고위 관계자는 "자칫 한은이 목소리를 내면 금감원과의 밥그릇싸움으로 비쳐질까봐 조심스럽다"고 털어놨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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