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버리기

이혜숙 < ks+partners 이사 · hslee@ks-ps.co.kr >

집을 넓혀 가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지금 집을 손보고 정리해 좀 더 살아보기로 결론내리고,주말마다 '버리기'를 시작했다.첫 주에는 옷을 버렸다.최근 1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을 정리하니 3분의 2가 사라졌다.터질 것 같던 옷장이 가벼워지면서 내 기분까지 가벼워졌다.둘째주,책을 버렸다.책마다 사연은 어찌 그리 많은지.한 권,한 권 쓰다듬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꼭 필요한 책들만 골라냈다.마음이 변할새라,이웃과 친구들에게 책 골라 가라고 전화부터 돌렸다.1000여권의 책들과 이별했다.셋째주,베란다 공사를 시작하면서 구석구석 숨어 있던 짐들이 끌려나왔다.압권은 4개의 박스였다.

결혼하면서 싸두었던 박스였는데,이사 때마다 풀지도 않고 구석자리에 모셔만 두어 기억에도 아스라한 박스들이었다.지하실에 숨어 살다 10여년 만에 햇빛을 보게 돼 눈도 뜨지 못하는 은둔인처럼,박스들의 몰골은 처참했다.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아 하루를 묵혔다.다음 날,박스들은 속을 삐죽이 내보이기 시작했다.'해방전후사의'로 시작하는 책 귀퉁이도 보이고,'마르크스' 들어가는 제목도 살짝 보였다.아마 저 옆에 '거꾸로 쓰는 세계사'도 있겠지 싶으니 피식 웃음이 나오면서 얼른 풀어보고 싶은 마음과,저걸 풀면 내 마음 속 추억까지 들춰낼 것 같은 두려움에 또 하룻밤을 잤다.

"그 박스 언제 버릴 거냐"는 가족들의 성화에 못이겨 다음 날 새벽 1시,용기를 내 박스를 열었다.첫 박스에는 책뿐이었다.왜 열어봤을까 후회하면서 둘째 박스를 개봉했다.편지였다.친구들의 편지는 아련했다.잠시 추억에 젖어 이민간 소꿉친구 생각에 눈물 한방울 맺힌 순간,노란색 빛바랜 봉투를 발견했다.묵직했다.허걱,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나의 과거 연애사가 담긴 편지들이었다.남편이 깨어 있을까,주변부터 살핀 후 친구들 편지도 그대로,모두 그대로 덮었다.나머지 두 박스는 풀지도 않고 야밤에 현관 밖으로 끌어내 버리고 말았다.자식농사와 재테크에 성공하는 비법이 다름 아닌 '버리기'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났다.과거의 생각과 지금의 욕심을 버려야 성공한다는 논리였으리라.광고주에게는 옛날의 패러다임과 모든 것을 다 넣겠다는 욕심을 버리시라고,그래야 성공적인 캠페인을 얻는다고 설득하면서,좁아터진 아파트 한 귀퉁이에 도움도 안 되는 '4개의 박스'를 모셔둔 나는 모순덩어리가 아니었는지….

버리고 또 버렸더니 요술을 부린 것처럼 집이 넓어졌다.'버리기'로 넓은 집을 얻은 것이다.내 인생을 넓히기 위한 '진짜 버리기',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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