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근 특파원의 이슈] 삐걱거리는 의료보험시스템

미국영화의 한 장면. 하루아침에 해고당한 직장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한마디 내뱉는다. "이제 의료보험료를 어떻게 내야 하지…." 직장을 잃으면서 가장 걱정스러운 일이 의료보험료라는 말인가. 한국인의 상식으로는 금세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에서는 그리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 한국에서도 의료보험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지만, 한국은 적어도 전국민 의료보험을 실시하고 있고 의료보험료도 생계에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미국은 다르다. 의료보험료가 살인적이다. 회사에서 직원들의 의료보험료를 부담하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5살짜리 아이가 있는 30대 초반의 부부가 한달에 지불하는 의료보험료는 최소 500달러. 1년에 의료보험료로 6,000달러(약 720만원)를 지출하는 것이다. 30대 초반의 독신 남성도 한달에 200달러 이상 지불해야 한다. 보험 적용범위가 늘어나면 보험료 부담도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의료보험 없이 살아가는 미국인이 늘고 있다. 미국 인구통계국에 따르면 2002년 말 현재 의료보험 미가입자가 4,360만명에 달한다. 한국 전체인구와 맞먹는 수준이다. 전체인구에서 의료보험 미가입자가 15.2%다. 미국에서는 특히 청년들의 의료보험 미가입이 증가하고 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들은 비싼 의료보험을 지불할 여유가 없고, 건강에 대한 자신감으로 병원에 갈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 인구통계국에 따르면 18~24세 청년들 가운데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숫자는 지난해 810만명으로 전체 의료보험 미가입자의 29.6%를 차지하고 있다. 소수민족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남미에서 이주해 온 히스패닉은 32.4%가 의료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다. 미국에서 의료보험 가입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은 경기침체로 상당수 고용주가 의료보험료 지급을 중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료보험료가 높아지면서 비용부담이 커진 고용주들이 의료보험 혜택을 줄이고 있는 것이다. 고용주가 의료보험료를 제공하는 비율이 61.3%에 불과한 상황에서 자꾸만 악화되고 있는 셈이다. 의료보험료는 내년에도 12%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올해는 실업률까지 치솟아 의료보험 없이 살아가는 미국인이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의료보험 미가입자로 살아가는 미국인들은 위험에 노출돼 있다. 만약 병에 걸리거나 다치면 엄청난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미국의 의료비는 상상을 초월한다. 간단한 감기로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도 진찰료가 100달러 이상 든다. 약값은 별도다. 병이 심각하면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진다. 의료보험 없이 병원에 갈 경우 개인 재정에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 텍사스 댈러스에 사는 20대 초반의 한 여성은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담석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비용이 3만달러나 청구돼 결국 파산신청을 해야만 했다. 미국에서 의료보험은 개인들에게 큰 딜레마다. 평소 병원에 갈 일이 거의 없는데 수백달러씩 보험료를 내자니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의료보험 미가입자로 지내자니 만약의 경우 질병에라도 걸리면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최근 미국 의료계에서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비싼 의료비와 의료보험료 부담을 줄이는 새로운 형태의 병원이 등장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의료보험 없이 아플 때 방문해 치료를 받고 의사에게 직접 진료비를 내는 병원이다. 보험회사를 포함한 중간단계를 없애고 의사와 환자가 직접 거래를 해서 의료비용을 줄인 것이다. 의료보험이 없어도 되고, 1회 방문에 비용이 35달러 정도에 불과하다. 새로운 형태의 병원은 이제 시도되고 있는 단계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미국 의료시스템을 혁신할 수 있는 한가지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zeneca@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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