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弱者 옹호의 정치학..정과리 <연세대 교수/문학평론가>

우연히 프랑스 위성방송을 켰다가 입이 딱 벌어져 아래턱이 빠질 뻔했다. 프랑스 대통령선거 1차 투표에서 극우정당인 '국민전선(Front National)'의 르펜(Le Pen)이 현 총리인 사회당의 조스팽을 제치고 2위를 한 것이다. 가히 폭탄 테러 수준의 충격이라 할 만하다. 시민혁명과 레지스탕스의 경험을 가진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니 기막힐 일이고,극우의 약진은 곧 파시즘의 부활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일단의 시민들이 바스티유 광장으로 몰려들고 '나는 운다. 프랑스인이라는 게 수치스럽다'는 피켓을 들었으며,좌파 정치인들이 파시즘으로부터 프랑스를 지키기 위해 우파인 시라크에게 투표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은,이 결과가 파시즘에 대한 우려를 심리적 공황으로 만들만한 사태였음을 보여준다. 파시즘 연구의 노(老) 권위자인 밀자(P Milza) 교수에 의하면,독재와 파시즘을 가르는 기준은 두가지다. 첫째,독재는 통상 기존의 지배계층과 결탁하고 있는 데 반해 파시즘은 새로운 집단을 창출하려 하며,이러한 의도는 궁극적으로 '새로운 인간'의 창조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순수 혈통의 아리안족을 위한 우생학은 이러한 의도의 결과라는 것이다. 둘째,독재는 통상 억압과 통제라는 방식을 택하지만,파시즘은 대중의 자발적이고 광신적인 동원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파시즘은 '극우'라고 불리고 있으나,어떤 하나의 이념이라기보다 정서적 광기가 이념의 형태로 뭉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르펜은 1차 투표 결과가 발표된 날 밤 '나는 사회적으로는 좌익이며,경제적으로는 우익이고,민족적으로는 프랑스의 편'이라고 대중을 위무해줄 게 틀림없는 입장을 표명했으니,극우가 이념이기 이전에 감정의 뭉치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과시'한 것이다. 대중의 자발적 동원을 위해 르펜이 강력하게 이용한 아이템은 그가 약자의 편이라는 것이다. '르몽드'는 르펜이 1974년 0.7%의 득표에서 오늘의 16.95%에 이르기까지 지지율을 높일 수 있었던 비결은 '멜로드라마 방식으로' '약자 옹호자'로서의 이미지를 쌓아간 데 있다고 분석한다. 그는 '힘없는 사람들''지위없는 사람들''배제당한 사람들'편임을 공공연히 드러내면서 그들에게 '꿈꾸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나 스스로 추위와 배고픔과 가난을 겪었다'고 말이다. 여기에서 나의 시선은 문득 한국의 정치판으로 옮겨 앉는다. 방금 읽은 말을 이 땅에서도 여러번 들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대선후보 경선과 서울시장 선거로 혼잡스러운 지금,정치인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자신에게 희생자의 이미지를 입히기에 여념이 없고,자신이 약자의 편이며,또 약자로서 이미 살았음을 증명하기에 급급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약자 이미지의 정치적 수단화가 곧바로 파시즘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한국의 현대사에 독재는 있었지만 파시즘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대중의 자발적 동원이라는 요소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시즘적 요소가 곳곳에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양에서 파시즘의 재출현을 알리는 징후들이 보스니아의 인종청소,스킨 헤드족의 도발,스포츠에 대한 대중적 열광 등이라면,한국에서의 그것들은 명백한 정치적 힘을 행사하고 있는 고질적 지역감정,정치가들이 틈만 나면 이용하는 맹목적 가족애,그리고 경제 교육 사회 등 모든 분야의 제도적 불안정 속에서 심화되고 있는 원한의 감정 및 그것의 무분별한 표출 등등이다. 이런 요소들은 서양의 것들보다 훨씬 산만하고 음성적이지만 그러나 훨씬 더 끈질기고 집착적이다. 아마 여기에 누군가 힘의 철학을 덧붙이기만 하면 이 요소들은 곧바로 조직과 이념의 형태를 갖추고 기름창고처럼 폭발할 지도 모른다. 힘의 철학이라니? 그건 냉정한 이성의 논리로 분석하고 풀이하는 게 아니라,가슴과 육체의 고통에 호소하고 그 고통을 폭력적 형태로 전화시킬 것을 촉구하는 다양한 종류의 논리적·정서적 담론들의 총화로서 만들어질 것이다. 한국 지식인들의 글과 말 속에서 그러한 심정적 담론이 갈수록 증대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그것이야말로 가장 우려해야 할 일이다. circe@yonsei.ac.kr

핫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