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란

매년 8월 15일 총리와 각료의 참배 여부를 둘러싸고 이목이 집중돼온 야스쿠니(靖國)신사는 한마디로 지금의 일본 사회에서 이른바 '대동아 전쟁 긍정론'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스쿠니 신사: 도쿄 중심가인 구단키타(九段北)에 자리를 틀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의 기원은 메이지(明治) 유신 때 천황을 위해 전사한 관군들을 기리기 위해 1869년 창건된 도쿄 초혼사(招魂社)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직후인 1945년 12월 연합국군 총사령부(GHQ)의 '신도지령'에 의해 국가 신도가 폐지되면서 전쟁중 육.해군성이 직접 관할하던 막강 '국가 기관'에서 일개 종교 법인으로 격하됐다. 도쿄돔의 2배가 넘는 9만9천㎡ 면적의 야스쿠니 신사에는 메이지 유신 당시 숨진 '천황의 충신'을 비롯해 청일, 러일, 중일, 태평양 전쟁 등 일본이 과거 100여년동안 일으켰던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들이 `군신'(軍神)으로 모셔져 있다. 전몰자 유골이나 위패는 없고 전몰자의 이름이 기재된 레이지보(靈璽簿. 합사명부)가 봉안돼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야스쿠니 신사측은 연간 600만명이 이곳을참배한다고 밝히고 있다. 현재의 전체 합사자 수는 246만6천344명. 이중 213만3천760명이 태평양 전쟁에서, 19만1천218명이 중일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들이다. ◆참배 논란: 야스쿠니 신사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는 과거 일본인들이 "천황을 위해 전사하면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모셔진다"는 말을 들고 전쟁터로 나갔다는 말이 단적으로 대변해 준다. 이와 함께 야스쿠니 신사측은 태평양 침략 전쟁을 `대동아 전쟁'으로 중일전쟁을 '지나(支那)사변'으로 호칭하고 있기도 하다. 한마디로 과거 군국주의와 국가신도를 유지, 고양시켰던 원점이자 지금의 보수우익 진영이 과거 전쟁을 미화, 정당화하는 정신적인 둥지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바로 야스쿠니 신사다. 이와 함께 야스쿠니 신사는 예나 지금이나 과거의 `존황(尊皇)사상' 등 천황 이데올로기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의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이 때문에 `일본 유족회'를 위시한 우익 세력은 야스쿠니 신사의 `복권'과 위상격상, 다시 말해 총리의 공식 참배를 실현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왔다. 자민당이 연합군 점령 정책에 의해 일개 종교법인으로 전락했던 야스쿠니 신사의 위상을 격상시키는 `야스쿠니 국가호지(國家護持)법안'을 1969년부터 74년까지무려 5차례나 국회에 제출했다가 결국 정교 분리 원칙에 반하는 `위헌' 문제 등으로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A급 전범 합사: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를 둘러싸고 비난의 대표적 표적이 되고 있는 A급 전범 문제는 1978년 야스쿠니 신사측이 후생성의 명단 통보를 토대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A급 전범 14명을 극비리에 합사하면서 비롯됐다. 이듬 해 언론 보도로 합사 사실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 이 문제를 놓고 후생성과 야스쿠니 신사측은 서로 그 책임을 떠넘기고 있으나 양자의 '합작 작품'이라는것이 대체적인 지적이다. A급 전범이란 2차대전 연합국의 극동 국제 군사 재판(도쿄 재판)에서 침략 전쟁을 계획, 준비, 수행한 '평화에 대한 죄'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았던 사람들을 지칭한다. 모두 28명이 A급 전범 판결을 받아 도조 전 총리 등 7명이 교수형에, 나머지는 종신 금고형 등을 받고 수형중 사망(5명)하거나 병사(2명)했다. 일본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체결후인 1953년 원호법을 개정하면서 이들 전범을 공무사(公務死)로 인정, 사실상 야스쿠니 신사 합사의 길을 열었었다. (도쿄=연합뉴스) 김용수특파원 ys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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