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이인성의 '향토적 서정주의' .. 17일부터 50주기 회고전

대구에서 태어난 이인성은 1929년 최고권위의 화가 등용문인 ''조선미전''에 입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18세의 어린 나이였다.연이은 조선미전 입상과 일본유학(1931년) 그리고 귀국(1935년) 후 작품활동을 통해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유학시절에는 일본제국미술전람회에도 출품해 일본에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초기 수채화작품들은 그가 색채감각이 뛰어나고 재능있는 화가였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이준 삼성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은 "30년대 그의 수채화 작품들은 70여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도 대단히 현대적인 감각을 느끼게 해준다"고 평한다.

유화작품들은 고갱 세잔 등 후기인상파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도 ''향토적 서정주의''라는 민족정서를 반영하려는 그의 노력이 엿보인다.

''경주의 산곡에서''는 고갱의 그림을 보는 듯한 인상이지만 자세히 보면 한국적인 정서가 담겨있다.기와파편,첨성대,맑은 하늘,적토(赤土) 등은 경주 남산의 풍경을 강한 색채로 나타내고 있다.

오광수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 작품을 ''역사화''라 부른다.

풀죽은 아이,아기업은 아낙네의 뭔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은 식민시대를 상징한다는 해석이다.사실 이인성만큼 평단에서 찬반양론이 일었던 화가도 드물다.

그는 1929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주관하던 조선미전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30여점을 출품했다.

이런 그의 이력으로 인해 ''출세지향의 관전(官展) 위주 작가,자기 스타일이 없는 화가''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하지만 일제점령기라는 당시의 현실에서 볼 때 이인성이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 과정에 돌발적인 죽음으로 인해 그의 작품세계는 미완으로 남게 된 셈이다.

전시는 내년 1월25일(월요일 휴관)까지.(02)771-2381∼2

이성구 기자 sk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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