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감시대] (43) 제1부 : 1997년 가을 <4> 정열의 사나이들

진성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현세 이사만은 잃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회사를 키우는 데 이현세는 꼭 필요한 인물이고 술이 얼근히 취한 이 기회에 마음을 열어놓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어 그와는 좀더 친숙해지길 바랐다. 진성호는 스튜어디스에게 칵테일 두 잔을 더 시켜 이현세와 같이 마셨다.

"저와 제 처의 관계를 알고 계시지요?"

이혼을 앞둔 별거상태인 아내와의 관계에 대해 묻자 이현세는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와 김명희라는 모델과의 관계도 소문을 들으셨지요?"

이현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방탕한 재벌 2세로 봅니까?" 진성호가 이현세를 빤히 쳐다보며 미소 속에 물었다.

"저는 결코 그렇게 보지 않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그렇게 보일 겁니다. 회사에 치명적이지요"

이현세가 단호하게 말했다. 진성호는 깜짝 놀랐다.

남자가 역경에 처할 때 믿을 수 있는 것은 은행에 있는 현금과 늙은 마누라와 개라는 말은 알고 있었으나,남자가 애초부터 역경에 처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진실을 얘기할 수 있는 용기 있는 동지라는 것을 진성호는 순간 깨달았다.

진성호는 스튜어디스에게 칵테일을 시켜 단숨에 들이켜고 다시 시켰다.

이현세가 마치 둘도 없는 연인인 듯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이현세가 김명희보다 자신에게 더 필요한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야 어찌되든 일단 이현세의 마음을 잡고 싶었다.

"제가 이 이사에게 남자 대 남자로 약속을 하지요. 아내와는 성격 차이로 이혼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동시에 김명희하고도 절연하겠어요. 대신 이 이사도 저에게 약속을 해주세요. 앞으로 적어도 10년 동안은 저를 도와주겠다고요."

진성호는 자신도 모르게 지껄여댔다.

이현세가 미소 속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진성호는 이현세의 손을 잡았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월 스트리트에서 2억 달러 조달이 잘돼야 할 텐데..."

이현세가 침묵을 깨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걱정 마세요. 미국에서 자금조달이 안 돼도 괜찮아요. 제가 떠나기 전 권혁배 의원에게 부탁했지요. 직물 분야의 공장을 팔아주면 커미션을 듬뿍 주기로 했으니 잘할 거예요. 틀림없이 백운직물 사장 백인홍과 단짝이므로 그자에게 말할 거고,그러면 백인홍은 분명히 인수할 거고요. 백인홍의 무덤은 그자의 허세가 팔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차차 알게 될 겁니다. 졸부의 두드러진 약점이 무엇인 줄 압니까?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되는 줄 알고 그 돈으로 명예를 사려고 달려들지요. 결국 그들이 살 수 있는 것은 불명예지요. 돈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불명예지요"

진성호가 말했다. 이현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취기가 한껏 올라 있었고,비행기는 일부변경선을 지나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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