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황장엽 망명과 남북관계 .. 김학준 <인천대 총장>

북한의 "조선로동당"중앙위원회 국제담당비서 황장엽의 망명은 참으로 엄청난 사건이다. 만일 김정일 정권이 붕괴된다면 "김정일 정권의 붕괴는 황장엽의 망명으로 촉발되기 시작했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황장엽 망명사건의 의미는 그처럼 크기 때문에 그것은 여러 각도에서 깊이 있게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남북 관계를 포함한 북한의 대외 관계에 그 사건이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첫째 이 사건은 무엇보다도 김정일 지도체제에 대해 매우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른바 주체 이론의 창시자이면서 개발자이고 보급자인 황장엽이, 더구나 김정일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만드는 과정에서 김정일에 관한 온갖 형태의 우상숭배를 책임관리해 온 황장엽이, 그리하여 김정일의 이론적 대부로 불려온 황장엽이 김정일을 비판하면서 망명했다는 사실은 김정일 개인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김정일 정권 그 자체를 하나의 웃음거리로 만들었다고할 것이다. 이러한 형편 아래에서 김정일의 행동 반경은 줄어들게 된다. 그가 만일 어떤 유연한, 또는 신축적인 길을 밟으려 한다면 그 행동은 굴복으로 비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러한 길을 취하지 못하게 된다. 그는 현상유지에 급급해질 것이며,그의 권위와 영향력은 점점 빠르게 줄어들 것이다. 둘째 이렇게 볼 때, 김정일 정권은 남북 관계의 개선을 위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사건 이전에도 김정일 정권은 남북 대화를 거부하였고, 남북 관계의 개선에 대해 저항적이었다. 그러한 마당에 황장엽 망명사건이 터졌으니 더더욱 남북대화에 대해 부정적인 자세를 취하게 될 것이다.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이 김정일 정권은 남북관계의 개선이, 특히 남북 경제협력의 활성화가 김정일 정권과 북한 사회주의 체제를 침식해 들어갈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자본주의가 자유민주주의의 바람과 함께 북한에 상륙하면 북한사회의 폐쇄적 성격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는 것을 그들은 정확히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황장엽 망명사건은 남풍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을 더욱 굳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적어도 1년 동안은 남북대화는 물론이고 남북 경제협력은 사실상 전면적으로 정지될 것이다. 셋째 황장엽 망명사건은 한반도의 주변 4강들 가운데 1차적으로 중국을 매우 미묘한 입장에 빠뜨렸다. 오늘날 중국은 남북한 모두와 수교하고 있다. 남쪽과는 경제협력을 중심으로 많은 방면에서 우의를 더욱 두텁게 해나가고 있고 북쪽과는 오랜 우정의 바탕 위에서 이념적 유대를 지속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제 어느 편의 손을 들어주어야 할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가 중시해야 할 대목은 두 가지다. 하나는 중국이 북한의 탈북자들을 북한의 요구에 맞게 처리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는 사실을 들수 있다. 중국은 앞으로 북한에서 정권 차원이나 체제 차원에서, 또는 국가 차원에서 붕괴가 발생하게 될 때 대규모의 난민이 중국으로 넘어오게 되는 것을 꺼려하고 있으며 그래서 탈북자들의 정치적 망명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중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5대 상임이사국들 가운데 하나로 국제사회의 규범과 관례를 존중해야 할 입장에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몇 해 동안에 중국이 보여 준 태도는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중국은 국제적 규범과 관행을 비교적 준수하는 모습을 보여온 것이다. 황장엽 망명과 관련해 중국은 국제적 규범과 관행을 존중하는 결정을 내릴 것으로 내다 보인다. 이렇게 될 때 중국과 북한 사이의 관계는 매우 차가워질 것이며 그것은 중국의 북한에 대한 정책에,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반도에 대한 정책에 하나의 결정적 전환점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넷째 일본과 북한 사이의 관계 개선은 이제 적어도 1년 안에는 기대할 수 없게 됐다. 누구보다도 일본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대해 어떤 매력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일본은 북한이 정권붕괴와 체제붕괴 쪽으로 가고 있다고 판단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북한과 왜 수교하려고 하겠는가. 다섯째 미국 역시 당분간 상황을 조용히 지켜 볼 것이다. 미국 정부의 기본 입장은 북한에서 격변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그 장래를 예견하기 어려운 격변이 일어나는 경우, 그것은 북한으로 하여금 자포자기에 싸여 남쪽과의 동반자살을 시도하게끔 유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황장엽 사건이 김정일 정권을 모험주의 쪽으로 이끌어 갈 것인지를 날카롭게 바라보면서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개선 시도를 당분간 중지할 것이다. 그러나 주변 4강들 가운데 그래도 제일먼저 어떤 행동을 취할 나라는 미국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정부로서는 어느 다른 나라보다도 미국과의 공조를 내실있게 다져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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