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 노사현장을 가다] (4) '핀칸티어리조선소' .. 'TQM'

바람과 파도의 오랜 풍화작용으로 기암절벽이 해안선을 따라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그림처럼 푸른 바다가 출렁이는 아드리아해. 이 바닷가에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조선소 핀칸티어리가 자리잡고 있다. 이탈리아반도 동북부의 공업도시 트리에스타시에 위치한 이 조선소는 "핀칸티어리의 역사가 이탈리아 조선산업의 역사"라는 명성에 걸맞게 수려한 아드리아해를 배경으로 지난 2백여년의 역사를 견뎌왔다. 지난 25년 이탈리아반도의 군소조선업체를 흡수하면서 대형조선소로 탈바꿈한 핀칸티어리 조선소는 지금까지 단 한번의 적자도 없이 안정된 경영을 유지해오고 있다. 지난 70년대를 전후로 유럽 및 지중해연안의 다른 조선소들이 급속히 퇴조기미를 보여왔던 점을 감안할 때 그 저력이 놀랍기만 하다. 이 조선소의 강점은 다름아닌 노사협력. 철저한 노사협의와 현장위주의 기술혁신을 통해 유럽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듣고있는 TQM(전사적 품질경영)시스템을 정착시킨 것이다. 생산성향상을 위해 노사간 대화가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으며 각 공정별 전문화과정에서 근로자들의 의견이 잘 반영되고 있다. 노사관계와 관련, 이 시스템은 지난 93년부터 품질 및 생산성이 향상될 경우 임금을 인상해주는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으나 실제로 생산성이 하락해도 임금이 낮아지지는 않는다. "네거티브"방식의 성과배분이 아니라 "포지티브"방식인 셈이다. 이 조선소는 또 근로자의 안전 및 근로조건, 급여에 대해 2년주기로 종합적인 조사를 벌이고 있다. 우선 작업장내에서의 인력 및 장비배치, 작업순환경로, 공정검사, 위험요인제거 등을 면밀히 분석, 산재를 예방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보고 있다. 조금이라도 위험하다고 판단될 경우 즉시 작업이 중지되며 위험요소가 제거된 뒤 작업재배치가 이뤄진다. 90년대들어 산재로 사망한 근로자가 2명에 불과한 것도 이때문이다. 이탈리아내 산재사회보장제도인 INAIL(산업재해기금)의 부담은 사용자측이 전액 부담하고 있으며 작업의 위험성에 따라 부담률이 달라진다. 핀칸티어리 조선소는 또 정부기관이 산출하는 공식 물가지수외에 회사내 경제정보팀이 별도의 물가정보를 수집, 임금인상에 반영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물론 회사의 물가산정지수는 정부발표지수보다 당연히 높다. 이는 소속 근로자들이 트리에스타시내에서 자주 이용하는 레스토랑 가게 슈퍼 등의 소비자가격을 알아보고, 근로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차량이나 여가선용행태 등을 자세히 조사하는 독특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는 근로자들이 피부로 느끼는 "장바구니"물가를 임금인상에 반영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따라 노사교섭에 있어서 물가인상률을 놓고 논란을 벌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비록 산별교섭체계아래 기업별 협의채널이긴 하지만 생산성향상분에 대한임금교섭만 이뤄지기 때문에 자체교섭기간도 짧다. 2년주기로 교섭이 이뤄지는 임금협상에 있어서 지난 94년 한해 평균 5% 인상에 노사양측이 흔쾌히 합의한 것도 이같은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탈리아내 조선.금속부분 사용자단체중의 하나인 "인터신드"의 직원 클라우디오하우저씨(43)는 "핀칸티어리의 노사협력의식은 서로가 맡은 역할을 잘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온다"며 "어느 한쪽이 요구하기전에 먼저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자율적으로 해나간다는 점은 타사업장의 모범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노조 역시 회사측에 못지않게 근로자들의 고충처리를 위해 여념이 없다. 그 대표적인 활동은 역시 산업안전. 단순히 작업장내에서의 안전뿐만 아니라 근로자들의 전반적인 건강을 체크하고 확인하는 체계적인 관리프로그램을 지니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사업장내에 복수노조가 허용되기 때문에 핀칸티어리 조선소내에는 3개의 노조가 조직돼 있다. 노조를 조직하는 것은 자유로우며 근로자는 원하는 노조에 언제든지 가입할 수 있다. 노조조직률은 약 70% 수준. 노조조직간의 경쟁때문에 근로자에 대한 "서비스"가 좋을 수 밖에 없다. 여기에다 유럽통합법 제6백25조는 노조측이 근로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건의한 내용에 대해 사용자측의 검토를 의무화하고 있어 구속력까지 갖추고 있다. 노조측은 지난해 의료보험에 있어서 근로자측의 부담을 줄여줄 것을 요구, 관철시키기도 했다. 근로자들이 자신이 원하는 노조에 가입하듯이 회사측도 자신들을 대표할 수 있는 기구에 가입할 수 있는 것이 이탈리아 노사관계법의 특징이다. 현재 조선부문에는 "인터신드" 등 6개의 사용자단체가 활동하고 있으며 산별교섭체제에 있어서 사용자측을 대표하는 것도 이들 단체이다. 산별교섭은 4년에 한번 이뤄지고 있지만 핀칸티어리조선소는 이와 별도로 2년에 한번씩 하고 있다. 회사측이 "장바구니"물가를 별도로 조사하는 것도 2년주기로 이뤄지는 별도의 교섭때문이다. 회사측관계자는 "4년주기의 교섭만으로는 수시로 변동되는 물가와 국내경제여건을 충분히 반영하기 어렵다"고 그 배경을 말했다. 노사양측은 또 뛰어난 근로자 능력개발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교육시간이 한달에 8시간에 이를 정도로 많은데다 이론과 현장을 연결하는 시스템이 잘 정비돼 있다. 이 조선소가 선박수주과정에서 협력회사들과 함께 턴키(일괄수주)방식을 유난히 많이 채택하고 있는 점도 이같은 능력개발시스템과 무관하지 않다. 핀칸티어리 조선소는 96년의 경영전략으로 "품질, 생산성, 인본주의 경영"을 채택하고 있다. "인본주의 경영"은 지난 90년부터 매년 들어가는 항목. 이 조선소는 사실 지난 90년 경기침체와 함께 수많은 근로자를 정리해고하는 아픔을 겪었다. 일부 선박수리소 등을 폐쇄하는 과정에서 2만여명의 근로자는 1만2천여명으로 줄었다. 노사양측은 노사합의아래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근로자를 감축해나갔으며 화합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년이 65세로 돼있었던 이 회사는 근로자가 65세전에 퇴직을 할 경우 5년치의 연금을 미리 지급해 주는 편법을 쓰긴 했지만 노사간 큰 마찰은 없었다. 그러나 다운사이징을 계기로 위기를 느끼기 시작한 노사양측은 더욱 단단헤진 결속력과 화합을 통해 적자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마침내 지난해 지중해연안의 조선업계로는 최대인 20억불의 매출을 올린 핀칸티어리 조선소는 대량감원의 부작용을 말끔히 털어버리고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2백여년이 넘는 핀칸티어리 조선소의 저력이 새삼 되새겨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조선업계의 전반적인 퇴조속에 서유럽의 자존심을 외롭게 지켜나가고있는 핀칸티어리의 노사화합경영이 세계조선업계의 벤치마킹대상으로 부각되고 있는 시점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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